본관은 여양(驪陽). 호는 매호(梅湖). 여양군(驪陽君) 진총후(陳寵厚)의 증손이다.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에 문신을 보호해 주었던 참지정사(參知政事) · 판병부사(判兵部事) 진준(陳俊)의 손자이다. 병부상서 진광수(陳光脩)의 아들이며 진식(陳湜)의 아우이고, 진온(陳溫)의 형이다.
출생연도는 기록에 없으나 그의 문집에 있는 「매호공소전(梅湖公小傳)」에 의하면 1200년(신종 3)에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략 118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진화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었고 명종이 신하들에게 「소상팔경(瀟湘八景)」 시를 짓도록 하였을 때에 어린 나이로 장편을 지어 이인로(李仁老)와 더불어 절창이라는 평을 받았다. 1198년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20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다음해에 내시(內侍)에 보직되였다. 1209년(희종 5) 학정(學正)으로 전직하였다. 1212년(강종 1)에 제과시험(制科試驗)에 참여하여 조서(詔書)를 짓는 일을 맡아보았다. 1213년에는 설화(舌禍)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한원(翰苑)에 들어갔다.
1215년(고종 2)에 관각제공(館閣諸公)에게 부시(賦詩) 40여운(韻)을 시험하였는데, 이규보(李奎報)가 수석을 차지하고 진화는 차석이었다. 서장관(書狀官)으로 금나라에 다녀온 뒤에 옥당(玉堂)으로 옮겨 지제고(知制誥)를 겸직하였다.
정언(正言)에서 보궐(補闕)을 거쳐 우사간이 되어 지공주사(知公州事)에 보직되었다가 재직 중에 별세하였다. 「한림별곡(翰林別曲)」 제1장에서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이라고 하였듯이 진화는 주필로 이름난 시인이다.
진화의 시는 현재 59수가 전하고 있다. 그 중 무신의 난 이후의 피폐한 농촌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도원가(桃源歌)」가 특히 유명하다.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지은 「사금통주구일(使金通州九日)」 · 「봉사입금(奉使入金)」 등의 시도 절창이다.
진화의 시는 관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와 자연을 소재로 한 정감을 표현한 시로 나뉜다. 자연을 묘사한 시에서는 산수 · 전원을 청담(淸淡)하게 표출하였다는 평을 얻고 있다.
허균(許筠)도 그의 시를 맑고 굳세어 읊을 만하다고 하였다. 스스로도 청나라를 위주로 시를 쓴다고 한 바가 있다.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청신(淸新)’ · ‘청려(淸麗)’ 등의 평어로 일관되어 있다.
1784년(정조 8)에 진화의 15세손 진후가 『동문선』 · 『동인시화』 · 『기아』 등에서 시작품을 찾아내어 『매호유고』를 간행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고려명현집(高麗明賢集)』 2집과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간행한 『한국문집총간』 2집에 영인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13년에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