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1976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단으로 쌓은 석축기단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고, 네모 기둥과 둥근 기둥을 함께 써서 지었다.
공포(栱包)는 익공식(翼工式)이며, 기본 가구(架構)는 1고주(高柱) 5량(樑)이며, 겹처마집이다. 내부는 동편은 우물마루이고 서편은 2칸의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1681년(숙종 7)에 부사 오도일(吳道一)이 창건하였고, 1705년에 부사 이희조(李喜朝)가 중건하였다.
또, 1726년(영조 2)에 부사 박필문(朴弼文)이 개축하였으며, 권돈인(權敦仁)이 편액을 썼다. 1900년에 부사 현인복(玄仁福)이 전체적으로 보수하였다. 이곳은 관아의 동헌(東軒)으로 집무를 행하였으며, 부속건물인 옥사(獄舍)는 조선 말기에 없어졌다.
현재 권돈인이 쓴 ‘錦屛軒(금병헌)’이라는 현판은 없고 객관(客館)이었던 청풍관에 걸려 있던 이희조가 쓴 ‘淸風館’이라는 현판이 옮겨져 걸려 있다.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원래 자리는 수몰되었고 건물은 1983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지었다. 이 때 원형에 맞도록 내부의 구조와 기둥 · 서까래 · 마루장 등을 일부분 보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