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金基悳)은 1934년 11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56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였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하면서 미공군부대 통역관으로 근무한 후 예비역 대한민국 공군 중사로 전역하였다.
대학 졸업 후 「단종애사」( 전창근, 1956)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김소동 · 한형모 등 당대 유명 감독의 조감독 및 편집기사로 활동하다가 1961년 차태진과 극동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해 전무이사 겸 전속 감독을 맡았다. 1961년 「5인의 해병」이라는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로 데뷔하였다.
1960년대 초중반 배우 신성일과 엄앵란 커플을 주연으로 한 「가정교사」(1963), 「떠날 때는 말없이」(1964), 「 맨발의 청춘」(1964) 등 이른바 ‘청춘영화’를 다수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들은 당대 젊은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시기 그는 「남과 북」(1964)과 같은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도 연출하였다. 이 영화들은 김기덕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다만, 「맨발의 청춘」은 일본 영화 「진흙 속의 순정」을 표절한 영화로 비판받기도 한다.
1960년대 후반 이후 김기덕의 연출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해졌다. 「대괴수 용가리」(1967)는 한국 특수촬영 영화의 시초로 거론되며, 최초로 야구를 소재로 삼았던 「사나이의 눈물」이나 최초로 실제 복서를 출연시킨 「내 주먹을 사라」(1966) 등은 본격 스포츠 영화의 시초 격인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말띠 신부」(1965)와 같은 독특한 코미디 영화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1977년 「영광의 9회말」을 끝으로 장편 극영화 연출을 그만두었고, 이후 서울예술전문대학(지금의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위원, 대종상영화제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2001년부터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2003년에는 부산예술대학 학장 등을 맡았다.
김기덕의 60여 편에 달하는 영화들은 대개 미학적 성취나 실험보다는 상업성이 두드러진 장르영화나 상업영화의 범주에 속한다. 그는 영화는 다수를 위한 대중오락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신념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상업영화를 연출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념의 연장선상에서 상업영화의 장르를 개척하였는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청춘영화는 물론, 야구나 축구 등을 소재로 한 스포츠 영화, 특수촬영을 도입한 괴수 영화 등이 그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은 김기덕의 회고전 기념 도서에 “한국 대중 · 장르영화의 최전선”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5인의 해병」(1961)으로 1962년 제1회 대종상 신인상 감독상을 수상하였고, 2003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