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목(兪賢穆)은 1925년 7월 2일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서 태어났으며, 덕성보통학교, 서울 휘문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황해도에서 월남한 유현목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의 뜻을 따라 신학을 전공하고자 하였으나,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합격하였다. 재학 중 영화동호회를 창설하여 시나리오 작업과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2009년 6월 28일 사망하였다.
1956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여 43편의 장편 극영화를 연출하였다. 1970년 소형영화동호회를 창설하여 회장을 맡기도 하였고, 1975년 한국영화인협회 부이사장을 맡았다. 1970년대 중반 유프로덕션을 설립하여 문화영화를 제작하였고, 1976년부터 1991년 사이에는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유현목은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영화촬영 현장에서 조감독으로 일하였다. 1956년 「교차로」로 데뷔하여 「인생차압」(1958), 「구름은 흘러도」(1959) 등의 영화를 연출하였다. 1961년 이범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연출한 「 오발탄」은 당대뿐 아니라 후대까지 한국영화사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영화는 한국 사회를 너무 어둡게 그렸다는 이유로 5 · 16군사쿠데타 직후 상영이 중단되었다가 1963년 재상영 허가가 이루어졌다.
이후 박경리의 원작을 영화화한 「 김약국의 딸들」(1963), 손창섭 원작의 「 잉여인간」(1964), 김은국 원작의 「 순교자」(1965) 등 문제작을 연출하였다. 1965년 3월에는 세계문학자유회의에서 주최한 한 세미나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된 이만희 감독을 옹호하여 당시 정권의 미움을 샀다. 당시 검찰은 유현목을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함과 동시에, 1965년에 연출한 「춘몽」의 제작 과정에서 여배우를 나체로 출연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음화제조죄로 기소하였다. 음화제조죄뿐 아니라 「반공법」 위반으로 동시 기소된 유일한 사례이다.
1960년대 후반 이후에도 홍성원 원작의 「막차로 온 손님들」(1967), 황순원 원작의 「카인의 후예」(1968), 선우휘 원작의 「 불꽃」(1975), 윤흥길 원작의 「 장마」(1979), 이문열 원작의 「 사람의 아들」(1980) 등 꾸준히 연출작을 이어갔다.
또한, 소형영화동호회 등을 창립하는 등 실험영화와 독립영화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하였으며, 1970년대 중반에는 유프로덕션을 설립하여 「로보트 태권V」 등 다수의 애니메이션 영화와 문화영화를 제작하였다. 1976년부터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한국영화발달사』 등의 책을 집필하였고, 폴 로다의 『기록영화론』 등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유현목의 전체 연출작은 43편으로, 1960~1970년대 영화계의 관행을 고려하면 다작이라 할 수는 없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기독교적 구원과 실존주의, 그리고 당대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비판적 리얼리즘) 등의 주제를 담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빈번하게 당대 거장들의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영화를 연출하였다. 그러나 그가 영화적 표현 방식에서 리얼리즘이나 문학적인 것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다양한 영화 형식적 실험을 통해 영화의 표현 영역을 넓힌 선구자적 감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유현목은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지성적이며 진지하고 실험적인 감독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