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은 조선시대 통신부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순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538년(중종 33)에 태어나 1593년(선조 26)에 사망했다. 1574년 사가독서했고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한 보고로 인해 임진왜란 발발 후 파직되었다. 이후 복직되어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사망했다.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자서절요』·『자성록』·『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했다. 정치적으로는 유성룡·김우옹 등과 남인을 이루었다.
1556년(명종 11) 동생 김복일(金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으로 이황을 찾아가 『서경』 · 『역학계몽(易學啓蒙)』 · 『심경』 · 『대학의의(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堯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 해 정자가 되었으며, 이어서 검열 · 대교 등을 거쳤다. 1572년 봉교(奉敎)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단종의 능)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채용할 것을 진언했으며, 임금의 덕과 당시의 잘못된 폐단에 대하여 논했다. 이듬 해 전적과 형조 · 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이어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 · 경연검토관 ·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친 후 정언의 신분으로 변장(邊將)에게 초피덧저고리[貂裘]를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이듬 해 이조 ·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중국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가계를 고쳐 달라고 사신을 보내 주청하던 일)를 위해 노력했으며, 돌아와 이듬 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 · 검상 · 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 · 삼수 · 길주 · 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의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 · 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 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임씨(林氏) · 나씨(羅氏) 사이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 조광조(趙光祖) · 이언적(李彦迪) · 이황 등을 제향하고,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자성록(自省錄)』 · 『퇴계집』 등을 편집 ·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에 이어 봉상시정 · 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 · 예빈시정 · 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사 부사(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 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했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되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였고, 함양 · 산음(山陰) · 단성 · 삼가(三嘉) · 거창 · 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 조선시대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과 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하여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김성일은 동인(東人)에 가담하였고,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 · 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
학문적으로 김성일은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김성일은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으며, 김성일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 이현일(李玄逸)- 이재(李栽)- 이상정(李象靖)으로 전해졌다.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家禮)』에 따라 행했으며, 『두씨통전(杜氏通典)』 · 『구씨의절(丘氏儀節)』 · 『향교예집(鄕校禮輯)』 등을 참고하여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었다. 그 밖의 저서로는 『해사록(海傞錄)』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 『학봉집(鶴峰集)』이 간행되었다.
1664년(현종 5) 신도비가 세워졌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 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