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은 임진왜란 때의 패배가 전라도 지방을 점령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1597년(선조 30) 7월말 왜군 11만 명이 좌 · 우군으로 나누어서 우군은 황석산성(黃石山城), 좌군은 남원을 공격하였다.
남원은 지역적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국가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왜적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는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과 광양현감 이원춘(李元春), 조방장 김경로(金敬老)의 군사와 명나라의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이 거느리는 3,000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같은 해 8월 7일에 왜군의 선봉대가 남원 지역에 나타났고, 13일에는 왜군의 주력군이 남원성 아래에 집결해 남원성을 포위하였다. 성의 동문에는 양원, 남문은 천총 장표(蔣表), 서문은 모승선(毛承先), 북문은 이복남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14·15일 이틀 동안의 전투에서 군, 관, 민이 합심해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명나라의 양원은 포위망을 뚫고 서문을 통해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접반사 정기원(鄭期遠),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김경로, 별장 신호(申灝), 부사 임현(任鉉), 통판 이덕회(李德懷), 이원춘, 진안현감 마응방(馬應房) 등이 전사했으며, 원군으로 왔던 명군 이신방(李新芳), 장표, 모승선 등도 전사하였다. 이밖에 성을 방어하던 2,000명의 병사와 1만여 명의 주민들이 함께 전사하였다.
난이 끝난 뒤 순절한 충신들과 전사한 병사, 그리고 주민들의 시신을 한곳에 함께 묻었고, 1612년( 광해군 4)에는 [충렬사(忠烈祠)를 건립해 여덟 명의 충신을 제향하였다. 원래 남원역 부근에 있던 것을 1964년에 약 1만 2,500㎡ 넓이의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971년에 보수 및 단청을 하였다. 1973년에도 정화 작업을 진행해 이듬해부터 무덤 1기(基)와 관리인 집 두 채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