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대사간 · 도승지 · 형조판서 ·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시백(施伯)
만사(晩沙)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3년(선조 6)
사망 연도
1645년(인조 23)
본관
달성(達城)
주요 관직
대사간|도승지|형조판서|우의정
내용 요약

서경우는 선조~인조 대의 문신이다. 문과에 급제한 뒤 주로 삼사와 육조의 낭청을 지냈고, 1612년(광해군 4)에는 정주목사로 외직에 나갔으나 계축옥사(1613) 이후 은거하였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호종하였으나, 경기감사로 재임하던 병자호란 때는 미처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1644년(인조 22)에는 우의정에 임명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정의
조선 후기 대사간 · 도승지 · 형조판서 ·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시백(施伯), 호는 만사(晩沙)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서고(徐固), 할아버지는 서해(徐嶰)이다. 아버지는 약봉(藥峰) 서성(徐渻), 어머니 여산송씨(礪山宋氏)는 목사 송영(宋寧)의 딸이다. 부인은 둘인데, 첫째 부인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성희순(成希舜)의 딸이고 둘째 부인 창녕성씨는 주1 성염(成恬)의 딸이다. 동생으로 서경수(徐景需), 서경빈(徐景霦), 서경주(徐景霌), 서경습(徐景霫)이 있다. 아들 서원리(徐元履)는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주요 활동

서경우는 29세가 되던 1601년(선조 34) 식년시에 입격하고, 2년 뒤 문과에 급제하였다. 급제 직후부터 승정원의 가주서(假注書)로 활동하였고, 1605년(선조 38)에는 주서로 임명되었다. 1606년(선조 39)에는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공조좌랑, 병조좌랑을 지냈다. 1607년(선조 40) 11월에는 정사 유인길(柳寅吉), 부사 최렴(崔濂)과 함께 사은사 행의 서장관으로 파견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부터 1611년(광해군 3)까지는 삼사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12년(광해군 4) 1월에는 암행어사로 임명되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통정대부(通政大夫)주2되어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외직에 나갔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선조유교(遺敎)를 받은 7명의 신하들이 죄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아버지인 서성(徐渻)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성이 유배되면서 서경우 역시 은거하며 지냈다. 인조반정 이후에 소환되었으나 그해 겨울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듬해인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국왕 인조 일행이 공주까지 내려갈 때 주3하였으며, 환도 이후에는 통정대부로 가자되었다.

1625년(인조 3) 모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예조참의에 주4되었고, 같은 해 3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이후 좌부승지(左副承旨), 우승지(右承旨)를 지냈다. 11월에는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1626년(인조 4) 호조참의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대사간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발하여 인조가 강화도로 주5하게 되자 호종하였다. 1629년(인조 7) 1월 대사간에 다시 임용되었고, 좌부승지와 우부승지를 지냈다.

1634년(인조 12) 3월 좌승지가 되었는데, 인조의 친부(親父)인 정원군(定遠君)의 원종(元宗) 추숭(追崇)에 성공한 것에 기여하여 반숙마(半熟馬, 조금 길들이 말) 1필을 하사받았다. 이듬해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형조참판과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5월 대사헌이 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경기감사 겸 개성 · 강화부유수(京畿監司兼開城江華府留守)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으나 남한산성에 미처 들어가지 못하여 경기감사에서 주6되었다. 1637년(인조 15)에는 대사간과 성균관 대사성을 번갈아 지내고, 같은 해 11월에 좌승지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1월 도승지가 되었다. 1638년(인조 16) 대사헌과 대사성, 도승지를 지낸 뒤 1639년(인조 17)에는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외직에 나갔다.

1641년(인조 19)에는 대사헌, 도승지를 번갈아 지냈다. 1642년(인조 20) 최명길(崔鳴吉), 이현영(李顯英), 이식(李植), 이경증(李景曾), 이후원(李厚源)과 함께 중국 심양에 가서 청나라의 조사를 받았다. 1643년(인조 21) 4월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성절사(聖節使)로 심양에 파견되었다. 1644년(인조 22) 9월 우의정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1645년(인조 23) 2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3월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대구서씨대동보(大丘徐氏大同譜)』
『만력29년신축사마방목(萬曆二十九年辛丑司馬榜目)』
『사대문궤(事大文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인조실록(仁祖實錄)』
『청음집(淸陰集)』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중추부에 속한 정이품 무관(武官) 벼슬.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경우 품계를 올려 주던 일. 또는 그 올린 품계. 왕의 즉위나 왕자의 탄생과 같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 있거나, 반란을 평정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주로 행하였다.    우리말샘

주3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 또는 그런 사람.    우리말샘

주4

추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    우리말샘

주5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던 일.    우리말샘

주6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을 이르던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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