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희 ()

이병희
이병희
유교
인물
일제강점기 때,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해 단연회 지부를 조직하였으며, 『성헌집』, 『조선사강목』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경회(景晦), 응회(應晦)
성헌(省軒)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9년(철종 10)
사망 연도
1938년
본관
여주(驪州)
출생지
경상남도 밀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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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해 단연회 지부를 조직하였으며, 『성헌집』, 『조선사강목』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회(景晦) 또는 응회(應晦), 호는 성헌(省軒). 밀양 출생. 아버지는 이익구(李翊九)이며, 어머니는 오천정씨(烏川鄭氏)로 정유검(鄭儒儉)의 딸이다. 선대가 경상도에 정착한 뒤에도 근기지방(近畿地方)의 실학자 특히 이익(李瀷)의 가르침을 받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부민들의 재산과 돈을 거두어 경복궁을 중수한다는 말을 듣고 「의소만여언(擬疏萬餘言)」을 지어 그 비리와 폐단을 말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받아 종약(宗約)을 입안해 착한 일을 권장하고, 의창(義倉)을 만들어 향리를 교화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

또한 국채보상운동(國債補償運動)에 참가해 단연회(斷烟會) 지부를 조직하고 그 취지문을 지어 향중과 영남 일대에 전파함으로써 주권 회복 운동에 힘썼다. 그 뒤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을 마치고는 서고정사(西皐精舍)에 거처하며 조선 중심의 역사인 『조선사강목(朝鮮史綱目)』을 집필하는 등 학문과 저술에 심혈을 기울였다.

3·1운동 후 일제의 탄압이 약해지자 화산의숙(華山義塾)을 복구해 사재를 투입, 규모를 확장해 정진의숙(正進義塾)을 설립해 지방교육의 발전에 여생을 바쳤다. 한편, 국권을 잃은 뒤 일제의 무단정치 아래 그때까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이익의 방대한 유고를 향리로 옮겨서 『성호집(星湖集)』을 간행하였다.

이병희는 시문에도 능해 특히 오언고시가 한위인(漢魏人)의 구기(口氣)를 닮았다는 평이 있다. 학문적 업적은 문집 가운데 잡저편인 「대학강의」·「심동정변(心動靜辨)」·「원사(原士)」·「이치(吏治)」·「대신(大臣)」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왜곡될지 모를 우리의 역사를 본래 모습대로 보존하기 위해 평생동안 노력해 쓴 『조선사강목』을 통해서 이병희의 역사관, 세계관, 조선왕조 시대사의 이해 태도를 알 수 있다. 저서로는 『성헌집(省軒集)』·『조선사강목』·『성헌요언별고(省軒堯言別稿)』가 있다.

참고문헌

『성헌집(省軒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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