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군사통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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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근대사
단체
1921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박용만, 신숙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독립운동단체.
단체
설립 시기
1921년 4월
설립자
박용만 외
설립지
중국 베이징
내용 요약

북경군사통일회는 1921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박용만, 신숙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독립운동단체이다. 1921년 4월 17일 베이징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조직하였으며,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군사상 총기관을 조직해 군사단체를 통일하고자 하였다.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에서 창조파의 입장을 취하였다.

정의
1921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박용만, 신숙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독립운동단체.
설립 목적

1920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박용만(朴容萬)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편벽적 인사 운용과 외교론을 비판하고 있던 의열단(義烈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천도교단의 인물들인 신숙(申肅), 신채호(申采浩), 이회영(李會榮), 배달무(裵達武), 김대지(金大池), 김갑(金甲), 장건상(張建相), 남공선(南公善)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조직하였다.

군사통일촉성회는 중국과 러시아의 각 단체 대표자들을 초청해 1921년 4월 17일 군사단체 통일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고, 북경군사통일회를 조직하였다. 참가 단체는 국내의 국민회(國民會) · 청년회(靑年會) · 노동당(勞動黨) · 광복단(光復團) · 통일당(統一黨),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 하와이의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 ·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團立), 북간도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박용만과 신숙의 지지자들이었다.

북경군사통일회는 각 지역에 흩어졌던 군사단체를 통일하고자 하였고, 장교 양성을 위해 중국이나 러시아에 6개월 혹은 1년 과정의 사관학교를 설치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송호(宋鎬)를 서간도에, 강구우(姜九禹)와 이민창(李民昌)을 북간도에, 남공선을 연해주에 파견하여 북경군사통일회 참여를 독려하였다.

또한, 활동자금 마련을 위해 각 참여 단체가 비용을 분담하기로 하였으며,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주1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서간도와 북간도에 사람을 파견해 회의 참석을 독려하였고, 베이징 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모았다.

변천 및 현황

북경군사통일회는 개최 초기부터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1921년 5월 안창호(安昌浩)가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개최 문제를 제기하자 국민대표회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1922년 상하이로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을 파견해 상하이 국민대표회기성회(國民代表會期成會)와 연계하여 국민대표회 개최를 준비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신숙, 강구우, 박건병(朴健秉) 등의 대표가 창조파((創造派)의 입장에 서서 활동하였다.

1922년 5월 27일 주2 대표들이 국민대표회에서 퇴장하자 창조파와 함께 비밀회의를 열고 국무위원제와 국민위원제를 골간으로 하는 임시정부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 회의에서 신숙은 국무위원회와 국민위원회의 위원 겸 내무위원장, 강구우는 국민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창조파와 함께 러시아 지역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신숙, 강구우 등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1924년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에 참석하였다. 하지만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의 지원 거부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북경군사통일회의 대표들은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참고문헌

논문

조규태, 「북경 ‘군사통일회의’의 조직과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 1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주석
주1

1930년대 남만주 지역의 최대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정부인 국민부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북간도에 파견한 단체

주2

안창호, 김동삼, 김철수 등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각종 제도와 명칭 등을 변경하여 임시정부를 민족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 개조하자는 입장

집필자
윤상원(전북대학교 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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