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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宋鎭禹)

정치인물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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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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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신평(新平). 호는 고하(古下). 어렸을때 이름은 옥윤(玉潤). 전라남도 담양 출생. 송훈(宋壎)의 넷째아들로, 어머니는 양씨(梁氏)이다.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한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 이후 30여 년 간『동아일보』를 이끌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학력
네 살때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하였으며, 뒤에는 의병장이었던 기삼연(奇參衍)에게서 수학하였다. 1904년 15세 때 정읍의 유씨(柳氏)와 혼인하였고, 2년 뒤에 담양 창평의 영학숙(英學塾)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김성수(金性洙)를 알게 되었다. 1907년 전라도 장성 백양사(白羊寺)의 말사인 청류암(淸流庵)에서 공부를 하던 중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절에서 나와 군산금호학교(金湖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김성수와 함께 새 학문을 연마하여 기울어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아야겠다는 결심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였으나 일제강점에 충격을 받고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하였으며, 이 무렵 유학생 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일을 맡아보았다. 당시 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유학생회의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을 펴냈다. 1915년 이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활동사항
1916년에 김성수가 인수한 중앙학교(中央學校) 교감이 되었으며 이어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8년 김성수·현상윤(玄相允)·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며 천도교와 기독교의 궐기가 확정되고 양교계의 행동통일이 이룩되어 3·1운동으로 결실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난 며칠 뒤 구속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다음해 10월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적용법조문 관계로 무죄선고를 받고 곧 출옥하였으나 사실상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되면서 김성수의 뒤를 이어 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로부터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사장 또는 고문·주필 등으로 동아일보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1922년에는 『동아일보』를 통하여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벌인 데 이어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을 제창, 추진하였으며, 1923년 재외동포위문회를 조직하고 국내 각지를 순회하여 위문금품의 모집운동을 개시하였다. 1924년 4월에 동아일보사 사장을 사임, 이해 10월에 동아일보사 고문에 취임하고 다음해에 주필에 취임하였다. 1925년에는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제1회 범태평양회의에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참석하고 귀국한 뒤, 「세계의 대세와 조선의 장래」라는 논설을 12회에 걸쳐 집필, 연재하여 한반도의 앞날을 예언하였다.
1926년 3월 국제농민본부에서 보낸 3·1절 기념사 관계로 『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이때 주필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정인보(鄭寅普)와 유칙(遺勅)의 작성을 획책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또, 같은 해 11월 ‘국제농민본부기념사’ 사건으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복역하던 중, 다음해 2월 일본의 새로운 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특사로 출옥하였다. 1927년 10월에는 김성수의 뒤를 이어 다시 동아일보사 제6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8년 제3회 범태평양회의가 일본경도(京都)에서 개최되어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는 『동아일보』 창간 10주년기념축사 관계로 제3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 해 9월에 속간하였다. 1931년 4월에 『동아일보』를 통하여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을 일으켜 모금으로 아산 현충사를 중수하였다.
1931년부터 4년간은 동아일보사를 중심으로 문맹퇴치를 위하여 하기 방학에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만주에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이 사건이 일본의 한중이간책(韓中離間策)임을 사설로 논파하여 한중민간의 보복중지를 호소하며, 또 희생된 중국인의 위문사업을 전개하여 뒷날 장개석(蔣介石) 국민정부주석으로부터 은패(銀牌)를 받았다.
1933년에는 동아일보사가 6년간의 준비 끝에 마련한 새 철자법에 의한 활자를 사용하는 등 한글의 보존과 발전에 힘썼다. 1934년 『동아일보』의 사설로써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 지지하여 종교의 자유를 지지하였다.
1936년 8월에는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우승자 손기정(孫基禎)의 운동복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게재한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자 총독부의 압력으로 11월에 사장을 사임하였다. 다음해 6월 『동아일보』가 복간되어 고문에 취임하였으나, 1939년 12월 총독부로부터 『동아일보』의 자진폐간을 강요당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객들에게 『동아일보』 폐간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귀국 도중 피검, 구속되어 다시 폐간을 강요받아 같은 해 8월에 『동아일보』는 강제로 폐간되었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서 총독부로부터 학도병 권유유세 등 대일협력을 강요받았으나 “『동아일보』는 내 입이요 내 귀며 호흡하는 코요 손과 발인데, 그 전부를 잘려버린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가!” 하며 거부하고 병을 핑계로 드러누웠다. 1943년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청산위원회가 해체되고, 동본사(東本社)가 설립되자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일본총독부측과 해방 후 치안권 위임 등을 제안 받았으나 그의 정세 판단에 따라 거부하였고, 이후 조선총독부는 여운형과 접촉하였다.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성수, 김병로, 원세훈(元世勳), 장덕수(張德秀), 서상일(徐相日) 9월 16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고, 12월 1일 『동아일보』가 복간되어 제8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2월 28일에는 신탁통치문제로 아놀드(Arnold, A. V.) 미군정장관과 회담을 통하여 반탁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였으며, 29일 밤에는 경교장(京橋莊)에서 임시정부요인들과 회담하였다. 미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에 대한 신중론을 피력하고 자택으로 돌아온 뒤 다음날 30일 상오 6시 한현우(韓賢宇)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74번지 자택에서 죽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상훈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송남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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