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후기 정축의 난과 관련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단양(丹陽)
주요 관직
병영중군(兵營中軍)
관련 사건
정축(丁丑)의 난(亂)
정의
조선후기 정축의 난과 관련된 무신.
개설

본관은 단양(丹陽). 증조는 판서 우중겸(禹仲謙)이며, 아버지는 통정대부 우몽룡(禹夢龍)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무과에 급제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영중군(兵營中軍)으로서 쌍령(雙嶺)에 이르러 청군과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때 죽음에 앞서 노복(奴僕)인 귀동(貴同)에게 당부하기를 “나는 곧 죽는다. 너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나를 위하여 뼈라도 거두어다오.” 하니 귀동이 울면서 말하기를, “이미 주인이 나라를 위하여 죽을진대 소인(奴)인들 어찌 주인을 위하여 죽지 않을 수 있으랴.” 하면서, 곧 시체 옆에서 따라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조정에서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정려하였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상주읍지(尙州邑誌)』
집필자
이종호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