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 서오릉에 있는 조선 제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단릉.
이칭
이칭
인경왕후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단릉
건립 시기
조선 후기(1681년)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인경왕후|숙종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475-92번지
내용 요약

익릉(翼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 서오릉에 있는 조선 제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단릉이다. 숭릉의 전례를 따라, 8칸 정자각과 재실의 공간 구성이 이루어져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의 특징을 갖는다. 창릉 · 경릉 · 명릉 · 홍릉과 함께 하나의 능역을 이루어 고양 서오릉으로 불리며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정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 서오릉에 있는 조선 제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단릉.
건립경위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는 1670년(현종 11)에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어 1674년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의 즉위로 왕비가 되었다. 1680년(숙종 6)에 천연두 증세를 보이더니 10월 26일에 경덕궁의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이튿날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을 주1로 삼고, 박신규 · 이익상 · 여성제 등을 주2 제조로 임명하였다.

11월 초부터 산릉의 터를 정하기 위한 주3의 절차가 이루어졌으며, 후보지로 숭릉(崇陵)의 왼쪽 언덕과 경릉(敬陵)의 오른쪽 언덕이 유력하였으며, 건원릉(健元陵)순릉(順陵) · 창릉(昌陵) 등 여러 곳이 거론되었다.

11월 15일에 숙종은 경릉의 주4으로 최종 결정을 하였다. 익릉의 건립은 1674년 숭릉의 전례를 따라 공역이 이루어졌다. 국상이 10월 말에 일어났으므로 겨울에 산릉의 공역이 행해졌으나, 국장 의례는 땅이 녹기를 기다려 다음 해(1681년) 2월 22일에 이루어졌다.

변천

1701년에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의 명릉(明陵)이 익릉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자락 너머에 쌍릉의 제도로 건립되었다. 1720년에 숙종이 명릉에 합부되었으며, 1757년에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의 능침이 명릉 능역에 자리 잡았다. 익릉을 시작으로 고양(高陽) 서오릉(西五陵)에 숙종과 세 왕후의 능침이 형성되었다.

형태와 특징

능상의 제도는 영릉(英陵)의 예를 따라 주5)과 주6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을 둘렀다. 능상은 3단으로 구성하여 주7으로 경계를 두었는데, 하계에는 계체석을 생략하였다. 상계에는 봉릉과 주8, 주9주10 등이 있으며, 중계에는 8각의 장명등(長明燈)과 주11이 있다. 하계에는 주12이 좌우에 마주 보고 서 있다.

숭릉의 전례를 따라 주13은 8칸 규모로 짓고, 주14의 안향청은 온돌 2칸에 마루 4칸으로 구성하여 총 6칸이며, 집사청은 온돌 4칸, 마루 2칸, 중문 1칸으로 총 7칸 규모이며, 참봉청은 전퇴를 포함하여 12칸 반 규모였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정자각의 좌우에는 주15과 수복방(守僕房)이 각 3칸으로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주16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어로는 지형을 따라 계단이 만들어진 것이 특색이다.

의의 및 평가

익릉은 1674년 숭릉의 전례를 따르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의 특징을 반영한 곳이다. 궁궐의 빈전에서 발인하여 산릉에 도착한 재궁을 국장하기 전까지 봉안하는 영악전(靈幄殿)이라는 임시 전각을 건립하지 않고 정자각을 활용하되, 정자각의 규모는 정전 3칸에 좌우 익각을 갖추어 5칸으로 하고 배위청을 3칸으로 하여 총 8칸 규모로 건립하여 규모를 확대하였다.

8칸 정자각의 전례는 조선 초기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광릉(光陵)의 정자각에서 참고하였으며, 이때 지붕은 주17이었다. 그러나 익릉의 8칸 정자각은 주18으로 좌우 익각부에 주19을 달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여 추녀와 서까래가 썩는 것을 예방하였다.

조선 후기에 8칸 정자각이 건립된 곳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 영릉(寧陵)과 현종(顯宗, 1641~1674, 재위 1659~1674)의 숭릉이며, 8칸 규모에 맞배지붕으로 조성된 사례는 익릉에서 시작되어 휘릉(徽陵), 명릉(明陵), 의릉(懿陵)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의 특색을 형성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인경왕후산릉도감의궤(仁敬王后山陵都監儀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Ⅵ』(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논문

신지혜, 「조선후기 영악전 기능 수용에 따른 정자각 평면변화 고찰」(『건축역사연구』 65집, 2009)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위키실록사전(http://dh.aks.ac.kr/sillokwiki)
주석
주1

국상(國喪)에 관한 모든 의식을 총괄적으로 맡아보던 임시 벼슬.    우리말샘

주2

임금이나 왕비의 능을 새로 만들 때 임시로 두던 기관.    우리말샘

주3

묏자리를 구하려고 산을 돌아봄.    우리말샘

주4

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축방(丑方)을 등지고 미방(未方)을 바라보는 방향. 또는 그렇게 앉은 자리. 북북동을 등지고 남남서를 바라보는 방향이다.    우리말샘

주5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6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둘레에 병풍석 대신으로 둘러 세운 돌.    우리말샘

주7

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 놓은 장대석.    우리말샘

주8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주9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0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11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12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13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14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우리말샘

주15

임금의 진지를 짓던 주방.    우리말샘

주16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우리말샘

주17

위 절반은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지붕.    우리말샘

주18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우리말샘

주19

박공집으로 지은 전각이나 신당(神堂)의 두 쪽 박공 아래에, 바람과 비를 막으려고 길이로 잇대는 널빤지.    우리말샘

집필자
신지혜(건축문헌고고스튜디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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