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교의 발생은 1894년(고종 31) 전라도에서 일어났던 동학혁명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동학혁명은 조선 말의 사회적 상황에 대하여 억압받고 소외되었던 농민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켰던 대표적인 사회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결국 그 이념과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가담하였던 하류계층은 혁명의 진행과정을 통하여 자신들의 욕구를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혁명 이전보다도 심한 욕구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급진적 성격을 가졌던 사람들은 이 혁명이 실패한 다음, 쉽사리 자기의 본래생활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사회를 개혁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는데, 증산교는 이들이 강일순을 중심으로 하여 일으킨 조선 말의 신종교운동이었다.
창시자 강일순은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을 따라다니며 혁명의 진행과정을 살펴볼 뿐, 이 혁명의 실패를 미리 알아차리고 싸움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사회적 혼란이 나타나게 되자,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세상을 구원할 길이 기성종교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신명(神明)에 의한 도술(道術)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동학의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는 주문이 천주를 모시고 온갖 도술조화를 부리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은 유교의 인도적(人道的)인 것에 그쳐 있어 신도적(神道的)인 조화가 없는 까닭에 세상과 인간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세상과 인간을 구원할 방법을 찾기 위하여 유교·불교·선교의 교리와 음양·풍수·복서·의술 등을 연구하였다. 또한 신명을 부리며 바람과 비를 불러오고 술법을 써서 자기 몸을 마음대로 다른 것으로 변하게 하는 도술과, 과거나 현재를 가릴 것 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환히 알 수 있는 도통공부를 하였다.
그 뒤에 그는 사회실정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1897년부터 3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다. 고향에 돌아온 뒤, 세상을 구원할 권능을 얻고자 1901년 전라북도모악산(母岳山)에 있는 대원사(大願寺)에 들어가 수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극심한 수도생활을 하던 중 같은 해 7월 하늘과 땅의 근본이 되는 바른 길, 즉 ‘천지대도(天地大道)’를 깨닫게 되고, 욕심·음란·성냄·어리석음의 네 가지를 극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일순이 도를 깨쳤다는 소문이 퍼짐에 따라 1902년부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문을 외우는 수련공부를 시켰으며, 환자를 치료할 때에는 한약처방에 의한 약물치료와 함께 주문을 외우게 하거나 또는 부적을 사용하고 안수치료를 같이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서 병을 고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를 신인(神人)으로 여기어 따르게 되었다. 더욱이 그는 자기가 하늘과 땅과 인간의 삼계대권(三界大權)을 가지고 있으며, 조화로 천지를 개벽하고 선경(仙境)을 열어 고통 속에 헤매는 중생을 건지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설교하였다.
이 때문에 그를 따르는 자들은 강일순이야말로 하느님으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러 내려온 구세주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의 종교집단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동학혁명 이후의 혼란과 함께 당시 정감록신앙과 불교의 미륵불출세사상, 그리고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가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풍설이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과 관련된다.
강일순은 1902년부터 1909년까지 7년 동안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포교지역은 전주·태인·정읍·고부·부안·순창·함열 등 동학혁명이 가장 활발하였던 전라북도의 7개 군이었지만, 주활동지는 자신이 광제국(廣濟局)이라는 한약방을 열었던 모악산 부근이었다.
당시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전라북도 사람들로서 동학혁명에 직접 가담하였던 농민들을 비롯한 하류계층이었으며, 성격은 대체로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다.
강일순은 포정소(布政所)·대학교(大學校)·복록소(福錄所)·수명소(壽命所) 등의 조직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종교명칭의 사용이나 조직구조의 체계화작업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종교의식의 중심인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을 상대로 하여 자신의 교리와 사상을 가르칠 뿐이었다.
강일순이 포교활동을 시작한 지 5년 뒤인 1907년, 그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의병을 모의한다는 혐의로 고부경무청에 체포된 일이 있었다. 이들은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강일순의 권능에 대한 회의는 점차 늘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그를 믿던 자들 가운데서는 그가 평소에 말하던 천지개벽이 늦음을 원망하거나, 그에게 조속히 선경을 이루어주도록 요구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에 그는 1909년 사망하였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의 허망한 죽음을 보고 실망한 채 그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않고 해산해 버렸고, 차경석(車京石), 김형렬(金亨烈) 등 몇몇 제자들만이 남아 장례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에서는 강일순이 평소 말하던 것처럼 그가 재림할 것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2년 뒤인 1911년, 강일순의 아내였던 고부인(高夫人)이 강일순의 생일치성을 드리다가 갑자기 졸도하여 4, 5시간 만에 깨어난 일이 있었다.
이 때부터 고부인은 강일순의 성령(聖靈)이 자신에게 옮겨졌다고 하며 강일순의 언행과 비슷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이 알려지자 과거 강일순을 따랐던 자들은 다시 고부인에게로 모여들게 되었다.
고부인을 중심으로 하나의 집단이 이루어지자, 이들은 1914년강일순을 교조로, 고부인을 교주로 하고 교명을 선도교(仙道敎, 일명 太乙敎)라고 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점차 번창하게 됨에 따라, 고부인의 이종사촌동생이며 강일순의 추종자였던 차경석(車京石)은 고부인과 일반신도들과의 접촉을 금지시키고, 교명을 보천교(普天敎)로 바꾸었다.
이렇게 하여 차경석의 실권이 강화되자, 고부인은 김제시 백산면 조당리로 거처를 옮기고 자기를 따르는 신도들을 모아 1919년 별도로 태을교라는 교명을 가지고 교단을 분리하였다.
차경석이 고부인과 갈등을 보이고 있을 때, 강일순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이 교단을 떠나거나 또는 각자 강일순으로부터 교통(敎統)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교단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강일순을 가장 먼저 따랐던 김형렬(金亨烈)은 1915년 모악산 금산사(金山寺)를 중심으로 별도의 교단을 세운 뒤 1921년 ‘불교진흥회’라고 부르다가 1922년에는 ‘미륵불교’라고 바꾸었다.
그리고 안내성(安乃成)은 1914년여수에서 ‘태을교’를 세운 다음 1925년에는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로 개명하였고, 이치복(李致福)은 1916년금구(金溝) 원평(院坪)에서 ‘제화교(濟化敎)’를 조직한 다음 다시 경상남도 하동에서 ‘삼덕교(三德敎)’를 세웠다.
박공우(朴公又)는 태인에서 ‘태을교’를, 문공신(文公信)은 정읍·김제·고창·부안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단을 만들었고, 김광찬(金光贊)은 남원에서 ‘증산교도리원파교단(甑山敎桃李園派敎團)’을 세웠다.
증산교단이 이와 같이 난립하게 된 것은 강일순이 살아 있을 때 추종자들에 대한 서열 규정이나 후계자 선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기성종교의 교리통합과 민족사상의 재정립에 주관심을 가졌었기 때문에 후계자들의 관점에 따라 불교계·선도계·유교계 등으로 교리해석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점과 관련된다.
증산교가 여러 교파로 나누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신자수는 크게 늘어가게 되었다. 특히 차경석의 보천교는 그 규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활동에 있어서도 많은 사회적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교세가 늘어가게 되자 1919년 ‘60방주(方主)’라는 전국적인 교구를 두었고, 그 뒤 5, 6개월 사이에 신자의 수효가 수십 만에 이르자 각 방주 밑에 몇 단계에 걸친 하부조직을 두었다.
이때 보천교에는 간부만도 55만7700명이나 되었는데, 신자의 총수효는 600만 명이라고 선전되었다. 보천교신자들은 교단에서 발급하는 인장(印章)과 교첩(敎帖)을 얻기 위하여 포교활동에 열중하면서 많은 헌금을 바치려고 노력하여, 항간에서는 보천교의 재산이 당시 우리 나라 전국토의 10분의 1을 살 수 있는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다.
차경석은 교세가 확장되자 보천교의 교명을 사용하기 1년 전인 1921년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단 명칭과 ‘시국(時國)’이라는 국호(國號)를 선포하면서 자신이 우리 나라의 황제로 등극하게 될 것처럼 선전하였다. 이 때 그의 제자들은 그를 ‘폐하(陛下)’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보천교의 교세가 커지고 교주인 차경석이 새로운 천자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자 총독부에서는 전국 각지의 보천교신자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경상도에서는 보천교신자를 처벌하는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수천 명의 교인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1919년의 만세 사건으로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던 만큼 100만이나 되는 신도를 거느린 대집단을 무력으로 탄압할 수만은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보천교에 대하여 강력한 탄압책을 구사하는 한편, 차경석을 회유하여 친일시키려는 노력도 끈질기게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본경찰에 제주도 신도들의 교무금을 압수당한 경험이 있던 차경석은 교단 재산과 교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1924년부터 친일단체인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는 등 친일 행위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후 보천교의 친일 행위에 대해 일반인들이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신도들을 구타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자 총독부는 이를 묵인하는 태도로 나갔다.
또한 1929년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본부에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 건립한 중앙교당 십일전(十一殿)의 준공식이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것이 차경석의 천자 등극식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관청에서는 소요 가능성을 내세워 끝내 불허함으로써 차경석의 천자등극은 무위로 끝나고 교단 분열의 발단을 만들었다.
결국 보천교에 대한 총독부의 정책은 회유하여 친일로 돌아서게 한 다음, 사회적으로 고립시켜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한편, 차경석이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강일순의 가르침이나 권위를 무시하게 되자, 보천교에서는 심한 갈등과 대립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보천교의 간부를 비롯한 일부 신자들은 보천교를 탈퇴하여 새로운 교단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태을교·동화교(東華敎)·서울대법사(大法社)·삼성교(三聖敎)·천인교(天人敎)·증산교객망리교단(甑山敎客望里敎團)·수산교(水山敎)·홍로교(烘爐敎)·보화교·선도교·무을교(戊乙敎)·임무교(壬戊敎)·인천교(人天敎)·원군교(元君敎) 등은 보천교에서 분파된 교단들이다.
뿐만 아니라 강일순을 따르던 자들의 제자들도 태극도(太極道)·순천교(順天敎) 등 새로운 교단들을 세우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의 한창 때에는 증산교의 교파가 100여 개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증산교는 보천교에서의 차경석의 천자등극의 실패와 그에 따른 분열, 그리고 1938년 조선총독부가 선포한 유사종교해산령으로 점차 위축되거나 해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총독부의 강경한 정책과 탄압은 증산교 각 교파의 많은 신도들이 투옥되어 옥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복이 되자, 침체상태에 있던 증산교의 각 교파들은 교단을 정비하고 교리를 체계화함으로써 민족종교로서의 성장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각 교파간 교리해석의 차이 때문에 증산교 각 교파간의 통합은 아직도 어려운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