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릉 ()

조선시대사
유적
조선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 경주김씨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쌍릉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정종|정안왕후
소재지
개성특별시 판문구역
내용 요약

후릉(厚陵)은 조선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 경주김씨의 능이다. 후릉은 병풍석은 있으나 다른 석물들은 조선왕릉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이다. 그래서 17세기 후반부터 검소함의 표상으로 여겨져 이후 석물 간소화의 기준이 되었다. 현재 북한의 개성특별시 판문구역에 있으며, 북한 보존급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정의
조선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 경주김씨의 능.
건립 경위

정안왕후가 1412년 승하하자 해풍군 백마산(白馬山) 동쪽 기슭 흥교동(興敎洞)에 능지를 정하고 후릉(厚陵)이라고 이름하였다. 정안왕후 후릉에 동원된 산릉군(山陵軍)이 모두 3천 명이었다고 한다. 정종이 승하하자 정종의 유명(遺命)을 따라 정안왕후 후릉에 합장해 쌍릉(雙陵)으로 조영되었다.

변천

1754년에 건립된 후릉 표석(表石)에는 "조선국 정종대왕 후릉 정안왕후부좌(朝鮮國 正宗大王 厚陵 定安王后祔左)"라고 새겨져 있어서 정종이 오른쪽, 정안왕후가 왼쪽에 안장되었다고 보았다. 『 세종실록』에는 정종(순효대왕)의 석실 및 주1 규모가 기록되어 있는데, 17세기와 18세기에 실측한 석물의 크기와 큰 차이가 있어서 태종 헌릉(獻陵) 석물의 치수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후릉 석물은 조선왕릉 중에서 가장 작은 작품인데, 이는 1667년 후릉 석물을 수리하면서 알려졌다. 1698년 단종 장릉(莊陵)정순왕후 사릉(思陵), 1701년 인현왕후 명릉(明陵) 등을 조성할 때 이 후릉의 척수를 적용하였다. 후릉 석물 치수 적용은 숙종이 지시한 것으로 정종이 검소하였기에 후릉 석물이 작다고 하였다.

형태와 특징

정종과 정안왕후 후릉은 상중하계(上中下階) 3단으로 조성되었으며, 상계에는 주2과 난간석(欄干石)을 두른 봉분과 주3, 주4, 주5, 혼유석망주석이 있다. 중계에는 장명등주6, 주7, 하계에는 주8과 석마가 건립되어 있다. 후릉 석물은 조선 전기 쌍릉의 체제를 따라 석상 2좌, 석인상 각각 2쌍, 석마 4쌍 등이 제작되어 있다.

춘관통고』에는 후릉에 정자각, 수라청(水刺廳), 주9, 표석, 홍살문, 전사청, 제기고(祭器庫), 안향청(安香廳), 재실, 연못 등의 시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는 표석만 남아 있다.

금석문

후릉 표석은 1754년에 덕종 경릉((敬陵), 문종 현릉(顯陵), 세조 광릉(光陵), 예종 창릉(昌陵), 성종 선릉(宣陵), 중종 정릉(靖陵) 표석과 함께 제작되었다. 이때 건립된 표석들은 앞면의 전서(篆書)홍봉한(洪鳳漢)이 쓰고, 뒷면의 음기(陰記)홍계희(洪啓禧)가 썼다.

의의 및 평가

후릉 석물은 조선왕릉 중 가장 작은 작품으로 숙종은 이것을 정종의 검소함으로 인식하고 왕릉 석물 간소화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단종 장릉, 정순왕후 사릉, 인현왕후 명릉 등이 후릉 석물의 크기를 따르고, 다시 사릉과 명릉 등이 다른 석물에 영향을 미쳐 18세기 왕릉 석물의 규모를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세종실록(世宗實錄)』
『춘관통고(春官通考)』
『후릉수개도감의궤(厚陵修改都監儀軌)』
『후릉현릉광릉경릉창릉선릉정릉 표석영건청의궤(厚陵顯陵光陵敬陵昌陵宣陵靖陵 表石營建廳儀軌)』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Ⅰ』(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주석
주1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주, 석등, 상석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2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3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4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5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주6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7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8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9

임금이 능에서 제사를 지내고 축문(祝文)을 태우던 곳.    우리말샘

집필자
김민규(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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