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옥 ()

조선시대사
사건
조선시대 문과(文科)의 부정으로 인해 일어난 대규모 옥사(獄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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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문과(文科)의 부정으로 인해 일어난 대규모 옥사(獄事).
개설

조선시대 문과는 총 804회 실시되었는데, 그 중에서 과옥이 일어난 것은 1699년(숙종 25) 11월의 기묘과옥(己卯科獄)과 1712년 6월의 임진과옥(壬辰科獄) 두 차례였다.

조선시대 과거 제도, 그 중에서도 문반 관료를 선발하는 문과는 핵심 정치 세력을 재생산하고 지배 이념을 유지하며 지배 신분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문과를 실시할 때에는 공정성이 엄격히 요구되었지만, 부정행위는 계속 되었다.

문과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는 응시생이 시험장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거나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답안지를 대신 작성하게 하는 것, 시험관과 서로 짜고 답안지의 내용의 일부 또는 답안지의 번호를 알려주어 채점 때에 참고하게 하는 것, 합격한 남의 답안지를 훔쳐서 대신 합격하는 일 등 여러 유형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급제자 전원의 급제를 취소시키는 파방(罷榜), 부정행위를 한 본인의 급제만을 취소시키는 삭방(削榜), 일정 기간 과거 응시를 금지시키는 정거(停擧) 등의 벌을 주었다.

그러나 처벌에도 불구하고 부정행위는 계속되었고, 특히 17세기 이후에는 정치운영 형태의 변화 속에서 정국 주도의 세력 범위가 당색으로나 지역적으로 점차 줄어드는 가운데 특정 정치세력들이 자파세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문과 시험을 활용하면서 부정행위에 정치세력이 연결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숙종대에 두 차례의 과옥이 일어난 것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였다.

역사적 배경

1699년과 1712년에 각각 일어난 두 차례의 과옥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갑술환국(甲戌換局: 숙종 20년) 이후 숙종은 탕평을 내세우면서 소론(少論) 대신계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 나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내세운 학문적·정치적 입장에서 늘 원칙과 명분을 내세워 정통을 자부하던 노론(老論)은 정국 운영에서 밀리게 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소론에 대한 공세를 가하였다. 1699년의 기묘과옥은 바로 노론이 문과 시험에 대한 소론의 불공정한 운영을 들추어 이를 소론의 권력 장악과 왕권의 위협으로까지 연결시켜 소론에 대한 국왕의 견제와 노론의 세력 확대를 꾀하며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후 노론 세력이 탕평을 압박하자 숙종은 숙종 31년부터 소론을 다시 등용하여 세력 균형을 도모했다. 이처럼 탕평이라는 이름하에 국왕의 의도로 소론 세력이 확대되고 상대적으로 노론이 위축되는 상황에다가, 정시의 시험 장소가 협소했던 문제까지 겹쳐지면서 발생한 것이 1712년의 임진과옥이었다.

경과/결과

1699년의 기묘과옥과 1712년의 임진과옥은 숙종 재위 후반기 이른바 국왕에 의해 ‘탕평’이 시도되고는 있지만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여전히 극심한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노론과 소론 모두 문과 시험을 통해서 자파 세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노론은 문과 시험에서 소론 출신의 시험관들이 소론 출신의 응시생을 부정하게 선발하였다는 것을 내세워 옥사를 일으켰고, 옥사를 조사·처리하는 과정에서는 국왕에게 “소론은 국정을 공정하게 운영할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 소론을 견제하게 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자신들을 국왕의 정국 운영 파트너로 선택하게 하였다.

1699년의 기묘과옥은 단종(端宗)의 복위를 경축하기 위해 실시한 증광시(증광문과)의 복시 때에 발생하였다. 기묘과옥의 가장 큰 문제가 된 사안은 응시생이 시험관과 짜고 시험지의 피봉을 바꿔치기하였다는 것, 시험관이 채점 과정에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정언(正言) 이탄(李坦)의 상소로 3년여의 조사가 마무리되면서 법 규정에 따라 상시관(上試官) 예조판서 오도일(吳道一) 등 부정행위 관련자들은 처벌을 받았다. 부정의 죄질이 나빴을 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 소론 계열의 다수 사람들이 연관되었던 점을 이유로 파방(罷榜)이라는 극단의 조치가 취해졌다.

1712년의 임진과옥은 중전(인현왕후)의 환후가 회복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실시된 정시(庭試)에서 비롯되었다. 임진과옥에 가장 문제가 된 사안은 이돈(李敦)·김창집(金昌集) 등 시험관이 시험 전에 응시생의 집을 두루 찾아다녔다는 것, 시험관과 짜고 미리 약속한 암표(暗標)를 시험지에 남겼다는 것, 시험장의 관리가 해이하여 시험 장소 밖에서 시험지를 작성한 자가 있었다는 것, 시험 시간이 종료된 후 시험지를 제출한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조사결과 마지막 문제가 되었던 사안은 본인이 자수하여 급제가 취소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안에 대해서는 재조사 끝에 관련자들 모두의 합격이 취소되고 귀양을 가는 처벌을 받았으며, 이듬해인 1713년에 대대적인 재조사를 통해 관련자들 중 일부가 처형됨으로써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의의와 평가

17세기 이후 조선시대 문과 시험의 부정행위에 정치세력이 연결되기 시작하였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되는 형태로써 숙종대 후반기에 기묘과옥·임진과옥 두 차례의 옥사가 발생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과옥이 발생한 이후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강도 높은 근절 규정을 만들어냈고, 이것은 이후 영조와 정조대의『속대전(續大典)』과『대전통편(大典通編)』에 법제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치세력과 연결된 문과 시험의 부정행위는 이후 권력 기반이 소수의 벌열 가문으로 축소된 세도집권기(勢道執權期)에 더욱 확대되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
『현종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
『영조실록』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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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숙종(肅宗祖) 과거(科擧) 부정(不正)의 실상(實相)과 그 대응책(對應策)」(우인수, 『한국사연구』130, 2005)
「조선후기(朝鮮後期) 숙종대(肅宗代) 기묘과옥(己卯科獄)에 대한 연구(硏究)」(차미희, 『국사관논총』93, 2000)
「학제(學制)와 과거제(科擧制)」(조좌호,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77)
「문과설행(文科設行)과 의옥사건(疑獄事件)」(이홍렬, 『백산학보』8, 1970)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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