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금 우리가 호칭하고 있는 김이란 용어의 유래를 찾아보면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해의(海衣)란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다. 46개 고을에 토산품으로 나오는데 전남지방에서는 영광(靈光)·장흥(長興)·나주(羅州)·영암(靈岩)·진도(珍島)·강진(康津)·해남(海南)·순천(順天)·보성(寶城)·고흥(高興)·광양(光陽) 등 11개 고을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김이라는 현대어가 해태(海苔)라고 표현된 최초의 기록은 1817년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의 저서 『경세유표(經世遺表)』에 나타난다. 해태는 감곽 또는 감태라고도 하는데 태(苔)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그 중 자태(紫苔)란 것이 있다고 했다. 자태는 속칭 해의(海衣)라고도 하고 또 사투리로 짐(朕)이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수산지(朝鮮水産誌)』에는 광양(光陽)의 물산으로 쌀·면화·철기·소금·해태 등 다섯 가지를 들고 그 중 해태가 가장 중요한 물산이며 국내 수위라 기록하고 있어 광양은 해태생산으로 유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의 시식에 대하여서는 조약도(助藥島)의 김유몽(金有夢), 완도 고금면 용장리 정시원(鄭時元) 등이 처음 시작하였다는 설과 광양의 김여익(金汝瀷, 1606-1660)이 시작하였다는 설이 있다.
김여익은 영암군 학산면몽해(夢海)에서 태어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자 의병을 일으켜 종형 김여준을 따라 청주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을 하게 되자 돌아온 뒤 고향을 떠나 장흥(長興)동백동(冬栢洞)을 거쳐 1640년 태인도(太仁島)로 들어가 살면서 김을 시식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1714년(숙종 40) 당시 광양현감이었던 허심(許鐔)이 지었다는 김여익의 묘표(墓表)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묘표는 남아 있지 않으나 김해 김씨 족보에 남아 있다.
후손들은 해태를 ‘김’이라 하는 것은 김여익이 태인도에서 김의 양식법을 창안하였는데 하동장(河東場)에서는 태인도의 김가(金家)가 기른 것이라 해서 “김”이라 했다고 한다.
오늘날 태인도에 남아 있는 재래식 양식법은 산죽이나 갈대 따위를 모래펄에 꽂는 일본홍(一本篊) 방식이고 완도의 재래식 양식법은 왕대를 가지고 발을 만든 뒤 좀 깊은 갯펄에 꽂은 염홍(簾篊)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