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 허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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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공예
유물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신라시대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
이칭
이칭
금제과대 및 요패(98호 북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보(1978년 12월 07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내용 요약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는 경상북도 경주시 미추왕릉 지구의 신라 시대 무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이다. 197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28개의 띠꾸미개, 1개의 교구(띠고리), 1개의 금구, 13개의 수하식(요패)으로 구성되어 있다. 띠꾸미개는 좌우가 대칭이며 사각형 판에 간략화된 인동무늬와 세 잎 무늬가 특징적이다. 이는 황남대총 남분 출토 금제 허리띠와 유사한 형태이다. 다만 북분 출토 허리띠에는 띠꾸미개와 수하식 및 금구에 보요 장식이 붙어 있다. 허리띠에 보요 장식이 가미된 것은 북분 출토 허리띠가 처음이다.

키워드
목차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신라시대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
개설

197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제 과대는 간략화된 인동당초 무늬와 삼엽무늬가 투조된 28개의 과판(銙板)과 1개의 교구(鉸具), 1개의 금구[帶端金具], 그리고 13개의 수하식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신라의 과대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황남대총 남분 출토 금제 과대와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제작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처럼 황남대총을 비롯한 5세기대 신라 허리띠의 띠꾸미개는 좌우가 대칭이면서 사각형 판에 인동무늬가 간략화된 세잎 무늬가 특징적이다.

내용

신라에서 금, 은제 공예품이 부장품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대의 일이다. 신라의 왕릉에서 금관과 함께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끄는 유물이 금제 허리띠[銙帶]이다. 과대는 고대 사회에서 착용자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위세품 중 하나였다. 신라의 과대는 중국의 진대 과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지만, 직접적인 수용은 고구려와의 교류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금과 은, 금동 등 재질의 차이에 따라 착장자의 신분에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신라에서는 주로 왕릉급 고분에서 금제 과대가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왕과 왕족은 금제, 귀족은 은제 허리띠를 착용한다. 이 경우 과대와 함께 관, 식리, 환두대도, 이식 등이 세트로 구성되어 동반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세트화된 일괄 부장품은 신라의 황남대총 단계에서 완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모든 무덤에서 완벽하게 일괄로 출토되는 것은 아니다. 가죽 허리띠 위에 용(龍)이나 인동무늬[忍冬紋]를 뚫어 장식한 금판을 부착하고 그 아랫쪽에 곱은옥[曲玉], 물고기, 손칼, 숫돌, 약통, 집게 등 각종의 장식을 매달았다. 이 허리띠 장식도 신분을 상징하며 죽은 사람의 지위에 따라 허리에 매다는 드리개의 형태와 갯수도 달랐다.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제 과대는 간략화된 인동당초 무늬와 삼엽무늬가 투조된 28개의 과판(銙板)과 1개의 교구(鉸具), 1개의 금구[帶端金具], 그리고 13개의 수하식으로 구성되었다. 과판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서 상단에는 간략화된 당초문양과 하단에는 삼엽문이 투조되었다. 과판은 하단부에 접하여 역심엽형으로 투조된 장식을 달고 있으며 과판의 방형판과 접한 부분에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이엽(二葉)의 문양이 시문되었다.

교구는 남분의 과대에서 보이던 형태와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전체적으로 방형을 띤 남분 과대의 교구와는 달리, 북분 과대의 것은 과판 아래에 붙어있는 역심엽형 장식과 유사한 심엽 형태에 끝이 뾰족한 당초 줄기가 결합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교구가 달린 과대는 황남대총의 북분 출토품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서봉총 출토 금제 과대, 천마총 출토 금제 과대, 대구 비산동 34호분 출토 은제 과대 등에서 비슷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지만 6세기 중반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게 된다.

수하식[腰佩]은 모두 13개가 달려있는데 단면이 편평한 방형판과 원형판을 교대로 엮어 만들었다. 작은 방형판의 상하에 둥근 고리를 만들어 원형판의 상하에 나 있는 장방형 홈에 끼웠다. 이 중 1개는 다른 것보다 크기가 크며, 보요 장식이 화려하게 달려 있다.

신라의 금제 과대의 대부분이 이처럼 크기가 큰 수하식 1개와 작은 수하식 여러 개로 구성되는 특징을 보인다. 둥근 원형판 사이에 장방형 판이 결합된 형태로서 북분 출토 과대에는 금으로 만든 2개의 곡옥형 장식과, 금모를 씌운 경옥(硬玉)이 달려 있다. 수하식 끝에 곡옥이 달려 있는 경우에는 원형판이 6개, 나머지 수하식에는 5개의 원형판이 달려 있다. 5개의 원형판으로 구성된 수하식 아래에는 숫돌 모양의 방형판, 물고기형 금판, 손칼모양 장식, 수실 모양 장식, 변형 용문이 투조된 판 등이 달려 있다. 허리띠에 각종 물건을 매다는 것은 원래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이었다. 처음에는 실용품을 매달다가 허리띠가 장송 의례품으로 바뀌면서 드리개의 내용도 비실용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왕이나 제사장이 관장했던 여러 가지의 일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추정된다.

수하식 아래에 달린 장식의 구성은 남분 출토품과 매우 유사하며 이후 시기의 금, 은제 과대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특히 방형판과 물고기형 금판, 변형 용문 투조 판, 곡옥 장식은 거의 모든 금제 과대에서 공통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장식이다.

북분 출토 과대의 특이한 것으로 보요 장식을 들 수 있다. 이는 남분 출토 과대에서는 보이지 않던 장식으로서 과판과 수하식 및 금구에 보요장식이 붙어 있다. 과대에 보요장식이 가미된 것은 북분 출토 과대가 처음으로서, 은이나 금동제 과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식이다. 그러나 이후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과대에서 주로 과판이나 수하식에 보요 장식이 달려 있음이 확인된다. 특히 수하식에 보요를 장식한 경우에는 다른 것보다 크기가 큰 수하식에만 보요를 장식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참고문헌

『공예』Ⅰ-고분미술(이한상, 예경, 2006)
『황금의 나라 신라』(이한상, 김영사, 2004)
『고분미술』Ⅰ·Ⅱ(이영훈·신광섭, 솔출판사, 2003)
『국립경주박물관 고고관』(국립경주박물관, 통천문화사, 2002)
『신라 황금 –신비한 황금의 나라』(국립경주박물관, 씨티파트너,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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