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필사본.
1689년(숙종 15, 己巳年) 유생 노이익(盧以益)이 『인조실록』에 수록된 효종을 헐뜯어 쓴 기사의 근원을 밝혀야 한다고 상소해 옥사가 일어났다. 이후 1694년(甲戌年) 이 옥사가 재론되어 노이익이 처형될 때까지의 『승정원일기』와 전교(傳敎)·소(疏)·차(箚)·계(啓) 등 각종 기록과 문서를 모아 엮은 책이다. 기사년에서 갑술년까지의 사건이므로 ‘기갑록’이라 하였다.
1677년 검열 윤의제(尹義濟)가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에 포쇄(曝曬 : 책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볕에 습기를 말림)하러 가서 『인조실록』에 효종이 뇌물을 써서 세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부친 윤휴(尹鑴)에게 전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윤휴는 그것을 밝히기 위해 상소하려 했으나, 당시의 집권당인 남인 영수들의 만류로 중지하였다. 그 뒤 1680년의 경신옥사로 윤휴는 처형되고, 윤의제는 귀양가서 죽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니 윤의제의 동생 하제(夏濟)가 노이익에게 요청하여 노이익의 명의로 소를 올렸다. 그러나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은 실록은 비사(秘史)이므로 내어다 살펴보는 것을 반대하는 차자(箚子)를 올려 사실 규명이 중지되었다.
노이익이 재차 소를 올리니,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의 건의로 중신회의를 소집하여 그 의견을 물어 내각소장(內閣所藏) 『인조실록』을 내다가 살펴보았다. 그 결과 효종을 헐뜯은 기사가 없다고 해 노이익은 정배되고 윤하제는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그런데 옥천 유생 이조겸(李祖謙)이 내각소장 『인조실록』에 두 줄 20여 자가 오려내어져 없어졌다는 풍문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이 상소로 인해 다시 중신회의가 소집되고 적상산(赤裳山)·오대산(五臺山)·봉화(奉化)의 각 사고에 사관(史官)을 보내어 실록을 내다가 살펴보게 하니 내각소장의 실록과 비슷하게 양행 20여자가 칼로 오려져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칼로 오린 것에 대한 규명은 하지 못하고 사건은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실권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국면이 싹 변해 노이익옥사는 다시 거론되어 국청이 설치되자, 노론은 역률로써 당시 남인의 집권자를 처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을 비롯한 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 소론의 영수들은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법례를 들어 반대하였다.
노이익도 선왕에 대해 헐뜯은 것을 바로잡아 보려 한 것이지 선왕을 헐뜯어 멸시하려는 뜻이 아니었다고 진술해 역률로써 다스리지 못하고 단지 사관을 모함하고 사림을 해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는 기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