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좨주 홍직필(洪直弼)의 ‘숙질론(叔姪論)’에 대해 이항로(李恒老)가 ‘부자론(父子論)’을 제기하면서 촉발하였다. 철종은 9촌 조카뻘인 헌종의 왕위와 종통(宗統)을 계승했으나, 그의 친속 계보는 재당숙인 순조를 잇는 형태가 되었다.
이 때문에 곧 친속들간의 호칭 문제라든가, 계보의 정리, 제사의 대수 등 여러 가지 전례상의 문제들이 야기되었고, 끝내는 진종(眞宗: 孝章世子, 英祖의 장자)의 조천예송(祧遷禮訟)으로 폭발하게 된 것이다. 1849년의 칭호 논쟁은 그 시작에 해당한다.
1849년 7월 헌종과 헌종비에 대한 제사 축문의 친속 호칭 문제가 제기되자 조정에서는 대신과 중신들의 수의를 받아 호칭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때 대신들과 홍직필은 헌종과 철종이 의리상 부자 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친속 호칭은 혈연의 항렬에 따라 쓰는 것이 좋다고 건의하였다.
이리하여 순조에 대해서는 황고(皇考) · 효자(孝子)의 칭호를, 익종에 대해서는 황형(皇兄) · 효사(孝嗣)의 칭호로, 헌종에 대해서는 황질(皇姪) · 사왕신(嗣王臣)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항로는 홍직필의 제자였던 김평묵(金平默)을 통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는 헌종과 철종의 관계에 대해 적극적으로 부자의 칭호를 쓸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제왕가에서는 왕위 계승으로 부자 관계를 삼아야 하고 본래의 친속으로 호칭할 수 없다는 의리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전례상 허다한 문제가 제기될 소지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철종이 헌종을 조카로 지칭할 경우 진종이 증조부가 되기 때문에 종묘에서의 조천을 두고 큰 사단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따라서 그는 홍직필에게 칭호의 개정을 건의하도록 촉구하였으나 무시되었다.
결국 2년 후인 1851년 6월 헌종을 종묘에 부묘하게 되자 진종의 조천 여부를 두고 심각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 영의정 권돈인(權敦仁)과 추사 김정희(金正喜) 등은 진종이 철종의 증조부이므로 종묘에서 조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좌의정 김흥근(金興根)과 홍직필 등은 헌종과 철종 사이에는 부자의 도리가 있고, 진종은 4대의 제사 대수를 넘었으므로 마땅히 조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때 홍직필은 소를 올려 전일의 황질(皇姪) · 사왕신(嗣王臣) 칭호의 과오에 대해 솔직히 시인하였다. 조정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120명이 넘는 대신 · 중신 · 유신들에게 수의를 실시하였고, 결국 조정에서는 다수 의견을 따라 조천을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