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딜방아는 발로 디디어 공이의 상하 움직임을 통해 곡식을 찧거나 빻는 방아이다. ‘디딜’과 ‘방아’로 이루어져 있다. ‘디딜’은 발로 딛는다는 뜻이고, ‘방아’는 공이의 상하운동을 통해 곡식을 찧거나 빻는 기구를 나타낸다. 따라서 디딜방아는 발로 밟아서 찧는 방아이며, 북한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발방아’라고 부른다. 방아류는 공이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사람의 손을 이용한 ‘손절구’, 발로 디뎌서 움직이는 ‘디딜방아’, 물의 힘을 이용한 ‘물레방아’와 ‘통방아’로 나뉜다.
한국에서는 외다리와 양다리를 모두 사용하다가 후에 양다리가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외다리는 4세기 무렵의 황해도 안악 3호분 고구려 무덤의 벽화와 5~6세기 경주 황남리 1호 고분에서 발굴된 디딜방아 토우 명기[길이 5.9㎝, 국립경주박물관 소장]를 통해 삼국시대에 이미 사용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안악 3호분 벽화는 한 사람은 외다리방아를 찧고 다른 한 사람은 찧은 곡식을 고르기 위하여 키에 담아 까부르는 장면을 그렸다. 그런데 5세기 초엽으로 비정되는 북한 남포특별시 강서구역 약수리 무덤 벽화의 디딜방아는 양다리인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외다리와 양다리를 모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798년(정조 22)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펴낸 『과농소초(課農小抄)』와 1799년(정조 23) 서호수(徐浩修)가 편찬한 『해동농서(海東農書)』에서 중국의 디딜방아는 외다리여서 한 사람이, 우리 것은 양다리인 까닭에 두 사람이 방아를 찧는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경직도」에서도 양다리방아를 두 사람이 각각 발로 밟고, 공이 쪽의 한 여인은 확 안의 곡물을 게끼거나 밖으로 나온 곡물을 빗자루로 다시 주1 안으로 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공이 끝에는 돌기된 쇠를 덧씌운 모습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삼국시대 외다리방아가 조선시대에 양다리방아로 바뀌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해준 것이다.
그런데 박지원은 중국의 외다리방아를 좋게 본 반면 조선의 양다리방아에 대해서는 9가지 이유를 들어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첫째, 양다리방아 재목을 구하기 어렵다. 둘째, 방아가 움직일 때마다 볼씨도 따라 움직여서 오래 견디지 못한다. 셋째, 볼씨가 움직이면 주2가 흔들거리고 이에 따라 방아머리도 흔들린다. 넷째, 방아를 찧는 사람의 몸무게가 서로 다르면 쌀개는 비뚤어지고 공이는 확 주변을 때린다. 다섯째, 한 사람이 확 옆에 붙어 앉아서 곡식을 쓸어 넣지 않으면 낟알이 전부 밖으로 튀어나온다.
여섯째, 방아머리가 가벼워서 돌을 잡아매는 경우 이것이 떨어져 낟알을 쓸어 넣는 사람이 다칠 염려가 있다. 일곱째, 한 집에 최소한 세 사람이 있어야 방아를 찧을 수 있어 바쁜 시절에는 세 사람이 모이기 어렵다. 여덟째, 방앗공이가 돌이 아닌 나무인 데다가 확 자리와 발 디디는 곳의 높낮이에 차이가 없어 오래 찧어도 껍질이 벗겨지지 않는다. 아홉째, 확 안쪽을 낮게 하고 평평하게 묻는 까닭에 공이가 떨어지면 낟알이 사방으로 튀어간다. 그러면서 중국 외다리방아의 장점을 앞서 말한 조선 양다리방아의 단점을 반대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박지원이 한중 두 나라의 디딜방아를 비교 관찰한 것은 실학자다운 면모를 보이지만, 중국의 것을 높이 보고 우리 것을 뒤떨어진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출발한 까닭에 잘못된 점이 적지 않다. 제가지방아는 한번 장만하면 튼튼해서 오래 쓰고, 주3나 쌀개가 흔들려도 망가지는 일이 없으며, 공이 길이에 적합한 확을 만들면 곡물이 튀는 일이 많지 않고, 마을 공동소유의 디딜방아는 비단 혼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일손을 돕기에 농민들이 소통하는 장소이다. 또한 여러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노래를 불러가며 찧는 까닭에 매우 능률적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고달픔을 덜 수 있는 장점도 지녔다.
곡식 찧는 효과도 외다리보다 커서 뛰어나다. 그리고 사람의 몸무게 차이도 다리의 위치를 달리 밟으면 되고, 심지어 46명이 방앗다리를 밟기도 하였다. 충청북도 음성군에서는 방앗다리 끝을 밟는 이가 가장 힘이 많이 들기에 상가래꾼, 옆에서 딛는 이를 옆가래꾼, 몸통 쪽을 밑가래꾼이라고 부른다. 이 방아로 78명의 여인이 하루 두 섬의 쌀을 찧었다. 박달나무 공이는 돌을 깰 정도로 단단하고, 기타 나무 공이에도 쇠를 덧씌우거나 돌을 붙여 사용하였다. 공이의 압력을 강화하기 위해 방아머리에 돌을 단단히 매달면 떨어질 염려도 없고 수시로 그것은 점검하면 그만이다. 마지막으로 중국 화북 지방은 밀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이라서 디딜방아보다 맷돌을 많이 사용한다. 디딜방아는 고추 등 소량의 양념을 만드는 데 주로 이용할 뿐이다.
디딜방아는 굵은 나무 한끝에 공이를 박고 다른 끝을 발로 디딜 수 있도록 만든다. 디딜방아 허리에는 방아를 걸 수 있게 몸통을 관통한 비녀목인 쌀개를 나무나 돌로 만든 기둥인 볼씨에 끼워 ‘지레의 원리’에 의해 발을 올려 눌렀다가 놓으면 공이가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방아를 찧는다. 공잇감은 참나무, 박달나무 등 단단한 나무를 선호하며, 방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공이 끝에 쇠를 덧씌우거나 돌공이를 붙여 사용하기도 한다.
디딜방아 다리 모습에 따라 외다리와 양다리로 나뉜다. 양다리는 방앗다리가 두 갈래로 갈라진 제가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외다리보다 규모 면에서 크다. 외다리가 한 사람이, 양다리는 최소 두 사람이 방앗다리를 밟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방아질을 하는 사람들은 방앗간 천장에 내린 새끼줄을 잡아 중심을 잡는데, 외다리는 다리쪽 좌우에 사람이 쥐기 편하게 철봉처럼 기둥을 세운 것을 잡고 몸의 중심을 잡는다. 외다리는 한국은 물론 아시아, 유럽 등 전 세계에서 널리 쓰인 반면, 양다리는 한국에서만 쓰인 발명품이다. 한국인은 제가지로 된 나무로 농기구를 만들면 튼튼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제가지지게의 경우도 한국에서만 사용한다.
디딜방아는 농기구이기지만 문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방아를 걸 때 몸체에는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庚申時姜太公造作)’이라는 명문을 적고, 이날 저녁에 고사를 지냈다. 고사를 지낼 때 시루떡과 정화수 한 그릇을 마련하고 “이 방아 걸고 나서 동티 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라고 축원을 올렸다. 동티는 흙이나 나무 또는 쇠를 잘못 다루거나 만졌을 때 귀신을 노하게 하여 질병에 걸리거나 심하면 죽게 되는 처벌을 가리키는 민간 용어이다.
강태공은 역사적 실존 인물로 문왕, 무왕을 도와서 상(商)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 공신이다. 그런데 민간에서 신적 존재로 부각되는 계기가 된 것은 명대에 쓰인 『봉신연의(封神演義)』에서 강태공이 신통력과 법력으로 사악한 귀신들을 쫓는 이야기에서 기인한다. 한 집에 임신부 둘이 같은 해에 해산을 하게 되면 불길하다는 속신(俗信)이 있어, 다른 임산부가 디딜방앗간을 산실로 삼은 것도 동티를 막기 위함이다. 나무의 동티를 막기 위해서 디딜방아를 고른 뒤에 베는 날을 잡으며, 나무를 자를 때 ‘어명(御命)’이라고 세 번 외친다. 어명에 따라 나무를 자른 것이니 나무를 자른 사람에게 산신은 노여워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디딜방아는 기우제, 역병 쫓기의 도구로도 이용한다. 영남지방에서는 가뭄이 계속되면 마을 부녀자들이 상복으로 갈아입고, 다른 마을의 디딜방아를 훔쳐 곡을 하면서 모래사장에 방앗다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세운다. 그리고 방앗다리에는 속옷이나 피 묻은 치마를 걸쳐둔다. 그러면 하늘이 부정한 피를 씻어내기 위해 비를 뿌려줄 것이라고 여긴다.
장티푸스, 콜레라[호열자] 등 전염병이 돌 때 여자들이 디딜방아 공이를 뽑아 진흙을 칠 한 다음 마을 바깥쪽을 향해 세워두거나 다른 마을의 디딜방아를 훔쳐 상엿소리를 내며 마을 입구에 세워두면 역병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여긴다. 통행인도 이것을 보고 전염병이 도는 마을의 출입을 삼가며, 바로 이 때문에 전염병이 확산하는 것을 막는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이 때문에 방아 주인은 자기 소유라는 사실을 주장하지 못하며, 병이 없어진 뒤에 사람들은 방아를 그 집에 다시 설치해준다.
디딜방아는 임산부가 만져서는 안될 금기의 농기구이다. 속신에 ‘임산부들은 디딜방아를 깔고 앉으면 아이를 12달 만에 낳는다’라고 한다. 이것은 임신한 여인에게 힘든 일을 시키지 못하게 하려고 만들어 낸 조상의 지혜라고 볼 수 있다.
디딜방아는 음양의 화합을 상징한다. 「춘향가」의 “너는 죽어 방아확이 되고 나는 죽어 방앗공이 되어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에 강태공의 조작처럼 떨크덩 떵떵 찧거 들면 나인 줄로 알려므나. 사랑사랑 내 사랑”이라는 소절은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조선시대 상류 가옥에서는 안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디딜방아를 세웠다. 특히 며느리가 과부인 경우에는 방아 찧는 소리에 마음이 동할까 봐 조심스럽게 방아를 찧었고, 밤에는 방아질을 하지 않았다. 방아질을 성행위에 빗댄 것은 「심청가」 방아타령 소절에서도 보인다.
디딜방아는 농기계의 등장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제는 민속촌이나 박물관에서 전시품으로 이용되고 있다. 디딜방아의 액막이 풍속도 사라졌지만, 현재 ‘무주 부남 디딜방아 액막이놀이’[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지정 2010. 5. 28.], ‘거창 상여디딜방아 액막이소리’[경상남도 무형유산, 지정 2016. 12. 15.] 등을 통해 놀이나 소리로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