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기구 ()

쟁기(강원도)
쟁기(강원도)
산업
개념
농사짓는 데 쓰이는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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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농기구는 농사짓는 데 쓰이는 도구이다. 신석기시대 농업의 시작과 함께 다양한 목제·석제 농기구가 등장하고, 삼국시대에 철기 농기구가 보급되면서 농기구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재래 농기구는 17종 120여 가지이고, 자연환경과 습속에 의해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한국 농기구의 특징은 다양성, 능률성, 견고성이다. 농기구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한국인의 상징적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지게, 가래, 양다리 디딜방아는 한국인의 발명품이고, 호미는 고된 노동의 상징이다. 많은 농기구가 기우제, 풍년 기원, 놀이와 주술의 상징물로 등장한다.

정의
농사짓는 데 쓰이는 도구.
연혁

신석기 전기중기 유적지에서 돌괭이 · 돌보습 · 돌삽 · 돌낫 · 반달돌칼 · 갈돌갈판 등이 발굴되는 것을 보면 이 시기에 이미 농경이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서기전 34세기로 추정되는 ‘ 농경문 청동기’에서 쌍날형 따비로 밭을 경작하는 모습을 보면 청동기시대에 농기구가 더욱 발전하였을 추정할 수 있다. 말굽형 따비 날과 쌍날형 따비 날이 창원 다호리, 당진 소소리, 부여 합송리, 장수 남양리, 부산 기장 고촌, 창원 신방리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것을 보면 초기 철기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철기시대에는 보습 · 괭이 · 쇠스랑 · · 호미 · 살포 · 등이 발굴됨에 따라 한국 농기구의 기초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보습이 전국적으로 고루 출토되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 초기부터 소에 의한 쟁기질이 보편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22년에 서울 몽촌토성[사적]에서 1500년 전 고구려의 목제 쟁기인 ‘가대기’가 출토되었고, 2024년에 평안북도 염주군의 나무 쟁기[철기 초기]와 유사한 ‘눕쟁기’가 발굴되어 삼국시대에 이미 한반도에서 다양한 쟁기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목기는 한반도 토질상 잔존율이 낮다는 특수성 때문에 주로 저습지 상태의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형태의 형태로 출토되는 사례가 적어서 완성된 형태를 추정하기도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2020년 현재, 120여 곳 이상의 청동기시대~통일신라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목기 중 농기구도 상당하다.

주로 주1, 수확, 곡물 가공 도구인 괭이[공주 신창동, 무안 양장리], 쌍날따비[창원 신방리], 고써레[함안 성산산성], 고무래[광주 동림동, 논산 마전리, 창원 신방리, 무안 양장리, 대구 매천동], 가래[부여 나성, 부여 궁남지, 하남 이성산성, 함안 성산산성], 곰방메[함안 성산산성], 지게발채[부여 나성과 능산리], 멍에[거제 폐왕성], 절구[김해 관동리, 부산 기장 고촌, 광양 마로산성], 절굿공이[무안 양장리, 김해 관동리, 부산 기장 고춘, 대구 매천동], 떡메[창원 신방리] 등이 발굴되었다. 신라시대 철제 농기구가 보습, 따비, 괭이, 쇠스랑, 낫, 살포, 삽, 자귀, 도끼 등 7종에 지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 목제 농기구의 발굴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목제 농기구 중 거제 폐왕성 집수지[삼국고려]의 참나무로 만든 꺾쇠형 멍에는 완전한 형태로 한 마리 소에 쟁기를 거는 ‘호리’로 쟁기 갈이를 하였음을 나타낸다. 무안 양장리[청동기통일신라]의 ‘발고무래’는 곡물을 건조할 때 가르는 농기구가 이미 오래전에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논의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사용하였던 살포는 한강금강, 만경강, 영산강, 섬진강 등 수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백제 지역에서 수전농업이 가장 활성화되었던 시기는 5세기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함안산성[신라 6~7세기]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고써레’는 그 원형이 완벽하여 당시의 농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고써레는 밭을 삶고 난 다음 , 옥수수 따위를 파종하기 위해 골을 타는 데 사용하는 일종의 파종 연장이다. 그 생김새가 써레와 비슷하여 고써레라고 부르지만, 써레처럼 흙을 삶는 기능은 없다. 고써레는 경상도 밭농사 지역에서 사용한 지역성이 강한 파종 연장인데 함안산성의 발굴로 그 역사가 삼국시대까지 소급된다는 것은 놀라운 발굴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인 조선 전기 『농사직설(農事直說)』[1429]에서는 따비 · 쟁기 · 쇠스랑 · 써레 · 끌개 · 번지 · 고무래 · 곰방메 · 오줌장군 · 호미 · 낫 · 도리깨 · · 거적 · · · · 부리망 등 근래까지 우리가 사용한 유사한 농기구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 후기 서호수(徐浩修)의 『 해동농서(海東農書)』[1798]에는 29종의 농기구 그림을 실었으며, 명칭도 한글로 적어 조선시대 농기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1900년대 초에는 일본 농민들이 한국으로 이주하면서 일제 농기구가 한국으로 들어왔다. 갈이용 쟁기를 비롯해 그네 · 정미기 · 양수기 · 회전탈곡기 등이 대표적이며, 우리 농기구 가운데 ‘왜’나 ‘양’ 자가 들어간 농기구는 일본에서 들어온 농기구이다. 대표 사례로 왜낫, 양쟁기 등을 들 수 있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축력(畜力)과 인력을 이용한 농기구로 농사를 지었다면, 1960년 중반부터 1980년 초반까지는 동력에 의한 농사가 중심을 이루었고, 그 이후에는 기계화된 작업 체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1963년 경운기(耕耘機)가 처음 등장하고, 1980년대 트랙터(tractor), 이앙기(移秧機), 콤바인(combine) 등 다양한 농기계가 등장하면서 재래 농기구 상당수가 사라지고, 또한 농업 방식도 직접 경영에서 간접 경영으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1960년대에 농업기계의 보급으로 농업 작업이 인력에서 동력으로 전환되었고, 또한 노임의 상승 등은 기계화를 촉진하였다. 농기계의 등장은 전통 공동노동 조직인 두레와 소품앗이 풍속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농업기계화는 농민들의 삶에 편리함을 제공하였지만, 고가의 농기구 구입에 따른 농가의 부채도 증가하는 문제점도 발생하였다.

김광언의 농기구 분류체계에 근거하고, 농사를 지어나가는 과정에 따라 사용한 재래 농기구를 분류하면 17종, 120가지에 이른다. 그것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 한국 재래 농기구 분류

농기구와 문화상징

한국 대표 운반구, 지게

지게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운반구이다. 한국전쟁에 참가한 유엔군은 피난민이 진 지게를 보고 ‘에이 프레임(A Frame)’이라고 불렀다. 그 형태가 알파벳 A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지게는 아무리 가난한 농가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한 채는 가지고 있었으며, 예전에는 식구 숫자대로 지게를 소유하였고 아이들이 질 수 있는 작은 지게도 만들었다. 지게는 좁은 길에서도 운반하기 편리하며 한국인이 발명한 고유 농기구이다. 중국에서는 지게 하면 조선족을 먼저 떠올리고, 일본으로 전해진 한국 지게는 현지에서는 ‘지케이’라고 불린다.

지게는 지역, 용도에 따라 그 형태와 명칭이 다르다. 또한 만드는 이에 따라 지게의 생김새가 다른지라 한 고개를 넘으면 지게의 형태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지게는 자연환경과 개인의 습관에 맞게 나름대로 발전한 것이다. 심지어 공장에서 만든 쇠 지게라고 하더라도 형태와 크기가 다른 것도 이를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게를 언제부터 사용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지게’라는 명칭은 정철(鄭澈)이 지은 권주가 「장진주사(將進酒辭)」에 처음 등장한다. ‘이 몸 주근 후(後)면 지게 우ᄒᆡ 거적 덮허 주리여 ᄆᆡ여가나.’라는 대목에서 16세기 초에 지게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 무덤에서 나온 토우(土偶) 중 지게를 진 인물상은 삼국시대에 이미 지게가 쓰였음을 말해준다.

지게는 지는 사람의 연령, 재질, 형태, 용도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연령에 따라서는 성인 지게와 어린이 지게로 분류되고, 재질에 따라서는 솔지게, 참나무지게 등으로 나뉜다. 지게 몸체와 가지의 조합 형태를 보고 한 가지 나무로 만든 것을 ‘제가지지게’, 지게 몸체에 다른 나무의 가지를 꽂은 것을 ‘쪽지게’, 가지가 없는 것을 ‘바지게’라고 한다. 제가지지게는 산간 지역에서 주로 만들고, 쪽지게는 지겟감을 구하기 어려운 평야 지역에서 즐겨 사용한다. 바지게는 보부상이 즐겨 사용한 지게이다.

지게 용도에 따라서는 산지게, 들지게, 바다지게, 나무지게, 나락지게, 거름지게, 물지게, 쟁기지게, 장사꾼지게 등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평야 지역과 산간 지역에서 쓴 지게의 크기는 다르다. 평야 지역의 지게는 몸체가 긴 반면 산간 지역의 것은 짧다. 이것은 지형적인 차이에서 오는 결과로, 산간 지역은 지형이 경사지고 산의 돌부리나 나무, 풀 따위가 많으므로 지게 다리가 길면 이것들에 걸려서 넘어질 확률이 높아서 지게 다리가 짧다. 그러나 지게 다리가 길면 지게를 지거나 내릴 때, 중간에 쉴 때 편리하기에 자연의 제약을 적게 받는 평야 지역에서는 이 지게를 사용한다. 지겟가지는 대부분 곧으나, 강원특별자치도 태백 산간 지역의 지겟가지는 중간 부분을 위쪽으로 구부려서 쓴다. 이것을 ‘옥지게’라고 부르는데, ‘가지가 오그라진 지게’라는 뜻이다. 나무가 많고 비탈진 곳에서는 지게를 지고서는 제대로 걸을 수 없기 때문에, 짐을 실었을 때는 지게를 뉘어놓은 채 사람이 목발을 두 손으로 잡고 끈다. 지겟가지를 구부린 것은 잘 미끄러지게 하기 위한 것이고, 다리가 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반 지게와 달리 단단하고 무거운 참나무로 만든다.

평야 지역에서 제가지지게도 사용하지만 전북특별자치도 평야 지역과 인천광역시 교동도에서는 쪽지게를 사용한다. 쪽지게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지겟감을 구하기 어렵고, 쉽게 지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쪽지게의 몸체는 일반 지게와 마찬가지로 소나무로 만들지만, 가지는 단단하고 질긴 참죽나무, 참나무, 아카시아나무 등으로 만든다. 교동도의 쪽지게는 다른 지게와 달리 지겟다리에 2~3개의 구멍을 뚫어 상황에 따라 가지를 옮기도록 만들었다. 즉, 무거운 짐인 경우에는 지겟가지를 윗구멍에, 가벼우면서 부피가 큰 것은 아랫구멍에 끼운다. 이러한 형태의 지게는 쪽지게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물고기를 나르는 데 쓰인 지게로는 전라남도 영광의 ‘조기지게’, 충청남도 서천의 ‘조락지게’, 경기도 도서지방의 ‘부게’ 등을 들 수 있다. ‘조기지게’는 다리는 95㎝로 매우 짧지만, 가지는 65㎝로 상대적으로 긴 편이다. 이 지게의 특징은 목발 사이의 너비를 크게 벌리기 위해 지겟다리를 바깥쪽으로 휘게 만들었다. 아마도 사람이 걸을 때 지겟다리가 걸리는 장애를 없애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게 몸체 뒤쪽에는 고무판을 대어 조기를 나를 때 몸에 물이 젖지 않도록 하였다. ‘조락지게’는 쪽지게에 소쿠리를 얹은 형태이고, ‘부게’는 가지가 없는 지게에 소쿠리를 엮은 형태와 소쿠리에 등태만 단 것이 있다.

우리나라 등짐장수들이 진 지게를 ‘바지게’라고 한다. 바지게는 일반 지게와 달리 가지가 없는 것으로 동해안 등짐장수들은 소금과 해초, 물고기 등을 날라 팔았다. 바지게의 특징은 지겟작대기가 일반 지게의 것보다 짧고, 이동 중 휴식을 취할 때 지게를 벗지 않고 마지막 주2에 촉작대기를 걸어 선 채로 휴식을 취한다. 지게를 벗은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면 오랫동안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립부여박물관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보부상 촉작대기를 소장하고 있다.

맷돌과 방아의 차이점

소가 돌리는 맷돌을 사람들은 ‘연자방아’라고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맷돌과 방아는 그 원리가 다르다. 즉 맷돌은 상하의 두 돌이 접촉을 통해 곡식의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내는 반면, 방아는 공이의 상하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연자방아는 연자매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맷돌과 방아는 사람의 힘뿐만 아니라 수력(水力)이나 축력을 이용하기도 한다. 맷돌은 대부분 사람의 힘을 이용하지만, 대형 맷돌의 경우는 축력을 이용하고, 물의 힘을 이용한 ‘ 물맷돌’도 존재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물맷돌이 존재하지 않지만, 고려 때 충렬왕이 물맷돌을 구경할 정도로 희소하였다. 물맷돌은 일반 맷돌과 달리 물바퀴를 통해 아래쪽 맷돌이 돌아가고 위짝을 통해 맷돌 사이의 간격을 조절해 곡식을 간다. 그러나 물맷돌은 많은 양의 곡식의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낼 때 사용하는 것이기에 일반 민가에서는 굳이 필요한 도구는 아니다.

맷돌은 크기에 따라 맷돌을 돌리는 방식이 다르다. 작은 맷돌은 앉아서 손으로만 돌리기에 ‘손맷돌’이라고 부르고, 가정에 한 틀씩은 가지고 있다. 지름이 60㎝ 정도 되는 중형 맷돌은 사람이 앉아서 손으로 돌리기에 불편하여 사람이 서서 또는 돌면서 맷돌질을 한다. 두부 공장에서는 곡식을 집어넣는 구멍 이외에 맷돌 상판 한쪽이나 가장자리에 낸 구멍에 두 가닥으로 뻗은 가지 채를 구멍에 끼우고 양손으로 채를 밀고 잡아당기면서 맷돌을 돌린다. 맷돌 가장자리에 2개 또는 4개의 비스듬히 구멍을 낸 맷돌은 구멍과 구멍 사이에 끈을 달고 그 사이를 나뭇가지로 연결해 바깥쪽으로 벋은 나뭇가지를 사람이 밀어 회전하면서 돌린다. 이러한 맷돌은 밭농사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지역에서 많이 사용한다. 대형 맷돌은 위짝 가장자리에 4개의 구멍을 만들어 구멍과 구멍 사이를 끈과 나무를 이용해 가축이 끌 수 있도록 한다. 대형 맷돌은 많은 사람들이 오는 사찰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소가 끄는 연자매는 개인 또는 마을 공동소유로 구분되며, 마을 공동소유의 연자매인 경우에는 를 조직하여 관리하고 운영한다. 계원이 아닌 사람이 방아를 찧을 때는 사용료를 받아 방아 수리비에 썼으며, 계원들 간에는 상을 당하거나 집을 짓거나 묘소를 수리하는 등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지낸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에서는 방아계의 좌목(座目)을 만들어, 기본금을 모아서 이자를 놓아 상을 당하였을 때 곡식을 부조하며, 방아 일이 바쁠 때는 선착순으로 찧고, 방아를 고치는 일에 게으른 사람들은 출자금을 돌려주지 않은 채 축출시키었다. 마을에서 불린 이자는 연말에 소를 잡아 자축하는 모임을 가지기도 한다.

방아는 공이를 사람의 손으로 움직이는 절구와 발로 움직이는 디딜방아, 물의 힘을 이용한 물레방아와 통방아로 나누어진다. 절구는 우리나라 보통 가정에서 한 틀씩은 보유하고 있으며, 재질도 나무, 돌, 쇠 등 다양하다. 디딜방아는 마을에 한두 개씩은 존재하며, 개인이나 마을 공동소유로 나뉜다. 개인 소유인 경우는 농사를 많이 짓는 집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며, 함경도의 경우는 모든 가정마다 디딜방아를 소유한 것을 보면 디딜방아가 논농사 지역보다 밭농사 지역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레방아는 물의 힘을 이용해 물레를 돌려 방아채를 상하로 움직이는 것이고, 통방아는 통나무의 한쪽을 파서 물이 그곳에 떨어지면 공이가 올라가고, 물이 쏟아지면서 방아를 찧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 방아는 수량이 풍부한 산간 지역에서 주로 사용한다.

맷돌과 방아는 쓰이는 용도가 차이를 보인다. 맷돌이 주로 가루를 내는 도구라면, 방아는 곡물의 껍질을 벗기거나 찧는 데 사용한다. 두부를 만들 때는 맷돌을 사용하고, 이나 고추를 찧을 때는 방아를 사용한다. 물론 연자매의 경우는 무거운 돌의 힘을 이용해 곡식의 껍질을 벗기는 데 사용되지만, 중간중간에 곡식을 거둬들여야만 곡식이 가루가 되지 않는다.

한편, 맷돌은 사용하지 않을 때는 위짝과 아래짝을 바꾸어서 보관한다. 맷돌이 곡물을 가는 것이기에 원래대로 놓으면 그 집안의 곡물을 다 갈아 가난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관하여야만 맷돌의 손잡이가 부러질 염려도 적다.

고된 노동의 상징, 호미질

농사일 가운데 가장 힘들고 고된 일이 여름철 논 김매기이다. 한국의 작물은 온도가 높고 습도가 많은 여름에 성장하기 때문에 잡풀도 이때 더불어 자라게 된다. 잡풀은 농작물에 공급되는 양분을 빼앗고, 햇빛을 막아 작물의 성장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김매기의 정도는 작물의 생산량을 좌우한다. 김매기는 단지 풀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흙을 부드럽게 해서 작물의 뿌리로 공기가 잘 통하게 하고, 흙을 뿌리 쪽으로 모아줌으로써 작물이 센 바람에도 잘 버티게 해준다. 흙을 뿌리에 쌓이게 하는 것을 ‘북을 준다’라고 하는데, ‘북’은 쏟아오르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북돋아 준다’, ‘북받치다’라는 표현도 ‘오른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호미로 고랑을 만들어 8월 장마철에 빗물 빠짐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한다.

논 김매기 횟수는 작물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조선시대 농서인 『농사직설』과 『색경(穡經)』에서는 는 3~4회 이상, 참깨는 3회, 은 2회, 녹두 · · 보리 · 등은 1회가 적당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농사직설』에서는 “논의 김매기는 모두 3~4회 하는데, 모가 반 자[15㎝] 정도 자라면 처음 호미로 매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예로부터 ‘호미 끝에 일백 그루의 벼가 생긴다’, ‘싹이 사람의 노력을 안다’라고 하여 김매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7월 15일 백중 때 논의 김매기가 끝나면 호미를 씻는 풍속이 있었는데, 고된 김매기가 끝났음을 나타낸다.

제초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촌의 논에서는 『농사직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 년에 34번의 김매기를 하였다. 모내기를 하고 1520일이 지나면 호미로 처음 매고, 다시 1015일 간격으로 24번 맨다. 처음 김매기를 초벌, 두 번째는 두벌, 세 번째는 세벌, 그리고 마지막을 망시라고 한다. 초벌과 두벌매기는 호미로 매고 세벌과 망시는 손으로 잡초를 뽑거나 발로 밟는 방법을 쓰는데, 이를 ‘훔치다’라고 한다.

밭의 김매기는 토양에 따라 다양한 호미를 사용하였다. 제주도처럼 땅이 화석재로 이루어져 단단한 지역에서는 호미 날이 날카롭고 좁은 것을 사용하였고, 잡돌이 많은 화전 지역에서는 잡초를 긁는 양귀호미를, 일반 지역에서도 나뭇잎, 괭이 모습과 같이 생긴 다양한 호미를 사용하였다. 목축을 하는 지역에서는 무성한 풀을 긴 주3으로 사용하여 줄기를 잘라버렸다. 그리고 콩이나 조, 옥수수를 심은 밭에서는 쟁기로 고랑 사이에 난 풀을 자르거나 흙에 묻어버렸다. 일제강점기에는 바퀴 날이 여러 개 달린 제초기로 잡초를 제거하기도 하였다.

써레씻이와 호미씻이

농경 세시 가운데 농기구인 써레와 호미를 씻어 걸어두는 풍속이 있다. 이들 농기구를 씻어서 걸어둔다는 것은 다시는 이들 도구를 사용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힘든 노동이 끝났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써레는 모를 내기 직전에 갈아놓은 논바닥의 덩어리진 흙을 깨뜨리며 바닥을 판판하게 고르는 데 쓰이는 농기구이다. 쟁기질에서부터 써레질까지는 모내기를 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으로 마지막에 사용한 써레를 씻어 걸어둠으로써 힘든 노동의 한고비를 넘겼고 잠시 농사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날에는 술과 음식, 풍물을 치면서 하루를 즐긴다.

농사일에서 가장 힘든 일이 여름철 김매기이고, 김매기가 끝났다는 것은 수확을 위한 모든 작업이 마치었음을 나타낸다. 김을 맬 때 쓰이는 호미를 씻어 걸어두는 것은 써레씻이와 마찬가지로 힘든 노동을 마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호미씻이 풍속은 조선 후기 유중림(柳重臨)『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 ‘세서회(洗鋤會)’로, 우하영(禹夏永)『천일록(千一錄)』에는 ‘세서연(洗鋤宴)’이라고 적고 있다. 즉, 호미를 씻고 연회를 행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농가에서는 이날 강변이나 개울가 또는 마을 주변의 그늘진 곳에서 집집이 성의껏 준비한 음식과 술을 가지고,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면서 놀았다. 머슴들이 많은 마을에서는 주인집에서 마련해준 음식물을 늘어놓고 머슴들 스스로 누가 대접을 잘 받는지 품평회를 하기도 하였다. 호미씻이의 명칭은 경기도 지역에서는 ‘호미걸이’, 영남지방에서는 ‘풋굿’, ‘초연(草宴)’이라고 말한다. 풋굿은 들판의 풀을 제거한 다음에 하는 굿이라는 뜻으로 한자로 옮기면 곧 초연(草宴)이 된다.

호미씻이를 하는 시기는 음력 7월 15일 백중이다. 그래서 백중놀이 하면 흔히 호미씻이를 말한다. 대표적인 놀이로 ‘ 밀양 백중놀이’를 들 수 있다. 그런데 호미 하면 여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농기구이고, 김매기는 여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는데, 호미씻이 잔치의 주축이 남자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호미씻이는 논의 김매기가 끝났음을 말하는 것이고, 논의 김매기는 여자가 아닌 남자들이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논의 잡초는 물기가 있는 논 깊숙이 뿌리 박혀 있어 여자들의 힘으로는 김을 맬 수 없다. 남자들이 사용하는 논 호미의 크기도 여자들이 사용하는 밭호미의 두 배 이상이 된다.

호남 지역에서는 머슴들 가운데 일을 가장 잘한 사람을 뽑아 소에 태워 주인집에서 후한 대접을 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날을 ‘머슴 생일날’이라고 하고, 융성한 음식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음력 이월 초하루 머슴 생일날은 농사의 시작을 앞두고 머슴들에게 베풀어주는 잔치이라면, 7월 백중은 봄부터 여름까지 농사를 짓느라 힘들었던 머슴들을 위로하는 피로연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 속에 한 해 농사가 잘되어 풍년이 이루어지도록 바라는 소망은 같다.

겨리사촌

쟁기는 소 한 마리가 견인하기도 하지만, 강원특별자치도, 함경도 등 산간 지역에서는 두 마리 소가 쟁기를 끈다. 쟁기를 소 한 마리에 거는 것을 ‘호리’, 두 마리에 거는 것을 ‘겨리’라 한다. 호리는 하나를 나타내는 ‘홑[홀로]’에서, 겨리는 맺을 결(結)이 연음되어 불린 명칭이다. 소는 대부분의 농가에서 한 마리를 키우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겨리로 밭갈이를 하는 지역에서는 소를 가진 농가끼리 짝을 이루어 농사를 짓는다. 이들 농가는 소로 인하여 사촌과 같은 관계가 형성되고 ‘겨리사촌’이라고 호칭을 한다. 겨리사촌은 농사는 물론 집안의 대소사에 서로 도움을 줄 정도로 관계가 끈끈하다.

‘호리’와 ‘겨리’는 그 형태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호리’는 쟁기 성에가 짧거나 두 가닥인 반면, 겨리는 성에가 길고 두 마리 소를 하나의 멍에에 연결하는 ‘쌍멍에’이다. 또한 두 마리 소가 견인하는 ‘겨리’라고 하더라도 쟁기의 형태와 용도에 따라 ‘연장’ · ‘보연장’ · ‘쌍가대기’ 등 다양하다.

우리가 언제부터 겨리를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사(高麗史)』권62 지권(志卷) 제16 적전조(籍田條)에 고려시대에 일소 80마리를 40개의 쟁기에 걸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18세기 말 우하영의 『천일록』에는 강원특별자치도 · 황해도 ·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산간지대에서 겨리를 사용하고 있음을 적고 있다.

겨리는 땅이 척박하고 잡풀이나 돌이 많은 산간 지역에서는 주로 사용한다. 겨리로 갈이를 할 때 두 마리의 소 중 힘이 세고 일을 잘하는 소를 ‘안소’ 또는 ‘마마소’라고 부르고, 쟁기를 잡은 사람이 소를 바라볼 때 왼쪽에 있다. ‘안소’보다 일을 할 줄 모르는 소는 ‘어저소’ 또는 ‘마라소’라고 부르며, 안소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따른다. 마마소는 어미 소, 마라소는 바른쪽에 위치한 소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번 어저소이면 영원히 어저소가 되며, 어저소를 가진 집에서는 안소를, 안소를 가진 집에서는 어저소를 키우는 농가와 사촌 관계를 맺는다.

수많은 눈을 가진 키와 체

아이들은 늦어도 3~4세가 되면 소변을 가리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가 지나도 밤에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싸는 것을 ‘야뇨증’이라고 한다. 야뇨증이 있는 아이는 자기가 오줌을 싼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까 봐 걱정하는 나머지 정신적으로 위축되어 소심하고, 자신감을 잃으며 커서는 사회생활에 막대한 지장이 생긴다. 또한, 야뇨증이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생기기도 하는데, 우리 조상들은 위와 같은 증세를 제거하기 ‘소금을 얻어 오라’는 구실을 삼아 아이를 여러 사람들 앞에 서게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아이는 소심함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감 있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소금을 얻어 온 아이는 그 이후부터는 오줌을 싸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만한 것이 소금을 얻으러 가는 아이에게 왜 키를 씌었는가 하는 것이다. 키는 곡식의 잡티를 일어내는 도구로서 주로 대나무로 만든다. 그런데 대나무로 만든 도구에는 수많은 틈이 생기는데, 사람들은 이 틈을 눈으로 본 것이다. 오줌싸게 아이에게 키를 씌우는 것은 연약한 아이를 수많은 눈을 가진 도구를 통해 보호하는 것이다.

수많은 틈을 눈으로 보는 사례는 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민간에서는 정월 초하루에 ‘야광귀’라는 귀신이 내려와 아이들의 신을 신어보고 맞으면 사라지는데, 신발의 주인은 재앙을 맞게 된다. 이러한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들의 신발을 감추고 마루의 기둥이나 벽에는 체를 걸어둔다. 민가에 내려온 야광귀는 자기도 모르게 체의 구멍을 헤아리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헤아리는 동안에 잊어버리고 또다시 처음부터 헤아리기를 몇 차례 반복한다. 그리하는 동안 날이 새고 닭이 울면 야광귀는 물러간다는 것이다. 『조선의 귀신』(1929) 저자인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은 야광귀가 문에 걸어둔 체를 어떤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또 체의 구멍을 그 얼굴에 붙어 있는 수많은 눈으로 보고 무서운 존재로 여겼다고 보았다. 즉 수많은 눈을 가진 존재가 집안을 지키기에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조리도 방문이나 기둥에 걸었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로써 쌀이 조리 안에 가득 차는 것이 마치 재물이 늘어나는 것과 같아 조리를 복조리라 부르기도 한다. 새해에 복조리를 걸어둠으로써 복과 재물이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리 안에 쌀이 모이는 동안에는 재물이 불어나지만 조리 안의 쌀이 털어지는 순간에는 모든 재물이 나가는 양면성을 지닌다. 조리를 거는 궁극적인 이유도 체나 키처럼 눈을 많이 가진 물건인지라 그것을 걸어 잡귀의 근접을 막기 위함이다. 한편, 장례에서 눈이 넷 달린 방상씨를 앞에 세우는 것도 눈을 여러 개 가진 얼굴이기에 잡귀들이 두려워하고, 숨어있는 잡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신령이 깃든 농기구들

농기구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지만 농민들은 농기구에 대해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못 쓰게 된 농기구라고 해서 함부로 버리거나 불에 태우지 않았다. 삼국시대 저습지에서 농기구들이 발굴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신령이 깃든 농기구를 대상으로 제의를 거행하였다.

맷돌은 하늘의 뜻을 알려주는 시험도구이다. 한국의 홍수설화에서 그 내용이 나온다. 큰 홍수가 나서 모든 사람은 죽고 오누이만 남게 되자 둘이 부부가 되지 않으면 인류의 종말이 오는지라 여동생은 오빠에게 혼인을 하자고 조르고, 결국 하늘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오빠와 여동생이 산에서 맷돌을 굴려 두 짝이 합쳐지면 하늘의 허락으로 여겨 결혼하기로 하였다. 맷돌을 굴린 결과 두 짝이 합쳐졌고, 그래서 오늘날 후손이 생기게 되었다. 여기서 맷돌은 현재 인류가 존재하게 해준 영물인 셈이다. 맷돌의 영물성은 맷돌과 소금 이야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맷돌 가운데 가장 큰 연자매를 처음 설치할 때는 간단한 음식을 차리고 고사를 지낸다. 제주도에서는 연자매가 잘 돌아 집안에 재물이 늘어나고, 가정이 내내 아무 탈이 없도록 빈다. 경기도 이천에서는 연자매 방앗간에 재물을 관장하는 ‘족제비업’에게 정기적으로 고사를 지내고, 연자매가 잘 돌고 부자 되기를 빈다.

디딜방아도 신이 지켜준다고 여긴다. 디딜방아 몸체에는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庚申時姜太公造作)’, 때론 강태공조작(姜太公造作) 대신 강태공하마처(姜太公下馬處)라는 명문이 보인다. 디딜방아에 상량문을 써넣는 것은 집을 짓는 것만큼 중요하게 여긴 것이며, 상량문에 경신(庚申)과 강태공(姜太公)이 등장하는 것은 벽사적 의미가 강하다. 경신일(庚申日)은 살(煞)을 누르는 성스러운 간지(干支)로 여겼고, 이러한 이유로 민간에서는 경신일과 경신시에 맞추어서 디딜방아를 새로 놓거나 고치고 디딜방앗간을 산실(産室)로 이용하는 등의 풍습이 전해졌다. 디딜방아를 걸 때는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이라고 쓰고 이날 저녁에 시루떡정화수 한 그릇을 마련하고 “이 방아 걸고 나서 동티가 없도록 도와주소서”라고 축원을 올렸다. 마을에 돌림병이 돌면 다른 마을의 디딜방아를 훔쳐 와서 마을 어귀에 거꾸로 세운 것도 디딜방아로 동티를 피하기 위한 조치이다.

강태공은 춘추시대의 대국이었던 제나라 시조로 역사적인 실존 인물이었으나, 당 고종 원년(元年, 674)에 무성왕(武成王)으로 봉해지고, 당 현종 19년(731)에는 황제의 명령으로 경도(京都)와 각 주(州)에 태공묘(太公廟)가 세워지고 무과에 시험을 보는 사람들은 먼저 태공묘를 찾아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강태공이 잡귀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한 것은 명나라 때 소설책 『봉신연의(封神演義)』의 영향이 크다. 책자에서 강태공이 주왕을 정벌한 후 전쟁에서 죽은 상나라와 주나라의 혼백들을 봉신하며, 원한을 풀어 살겁(殺劫)을 제거하자 모든 신이 감동하여 그에게 복종하게 된다. 또한 강태공이 신통력과 법력으로 사악한 귀신들을 쫓고, 집의 상량신으로 등장한다. 강태공이 가옥의 상량이나 디딜방아에 등장하는 것은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행위이다.

한편, 디딜방아를 만드는 나무도 신성하다고 여긴다.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에서는 방앗감을 고른 뒤에 베는 날을 따로 잡으며, 충청북도 음성에서는 나무를 자를 때 ‘어명(御命)’이라고 세 번 외친다. 어명에 따라 나무를 자른 것이니 나무를 자른 사람에게 산신은 노여워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풍년 기원과 농기구

경기도, 충청도에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지게에 갈퀴 · 가마니 · 삼태기 · 새끼줄 · 싸리비 · 도리깨 등 타작을 할 때 필요한 농기구를 얹어 대문 바깥에 놓아두었다가, 대보름 아침 집 안으로 들여온다. 이것은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으로 가을걷이에 주로 쓰이는 농기구를 지게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경상북도 농가에서도 수수깡으로 지게 모형과 벼, 보리, 목화 따위의 농작물을 만들어 두었다가 저녁에 달맞이를 하고 나서 타작하는 시늉을 한다. 실물대신 수수깡으로 만들었다는 차이뿐이지 상징적인 의미는 같다.

쟁기 갈이 의식을 통해 풍년을 기원한다. 봄 갈이를 앞에 두고 길일(吉日)을 선택해 가까운 ‘춘지(春地)’에서 그 해 재산신의 방향 위치를 고려해 곡식을 갈무리하는 ‘ 통가리’ 모양으로 쟁기질을 한다. 길일로 돼지날, 뱀날, 쥐날로 여기고, 그중에서도 돼지날을 가장 좋다고 여긴다. 이러한 의식을 강원특별자치도 정선 남면에서는 ‘보냄’이라고 한다. 보냄은 풍년 기원은 물론 농사철에 사람과 소가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보냄 날에는 솔가지를 꺾어 대문 옆에 표시해 두고, 이날은 부인네들이 서로 왕래를 하면 ‘쟁기가 부러진다’라고 하여 외출을 삼간다. 전라도 지방에서도 정월 첫 번째 소날에 쟁기를 메워 몇 마지기의 논밭을 가는 의식을 한다. 이것은 소로 하여금 ‘논밭뚝[방아리]을 밟혀본다’는 의미이고, 이것을 ‘소 방아리 붙인다’고 말한다.

키질을 할 때는 집 안쪽을 향해서 한다. 만약 바깥쪽으로 서서 키질을 하면 복이 그만큼 나간다고 여긴다. 또한 키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배가 위로 향하도록 한다. 만약 엎어놓으면 곡식이 땅으로 쏟아져 집안의 재물이 줄어든다고 여긴다. 곡식의 양을 헤아리는 되도 쓰지 않을 때 키와 마찬가지로 잦혀둔다.

마른풀 등을 긁어모으는 갈퀴는 복과 재물을 긁어모으는 도구로 이용된다. 정초에 갈퀴를 사다가 문에 걸어두면 그해 풍년이 들고 재물이 들어온다고 여긴다. 근래에는 상점이나 음식점에서 작은 갈퀴를 문에 걸어둔다. 갈퀴가 긁어모으는 연장이듯 재물이 모이기를 바라는 주술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가마니도 풍년을 상징하는 도구로 쓰인다. 전라남도 진도군 일대에서는 정월대보름에 장대를 세워 가마니를 매워두는데 그러면 농사가 잘된다고 한다. 가마니를 거는 것은 많은 곡식을 거둘 것이라는 주술적인 행위이다. 흔히 돈을 손쉽게 버는 것을 ‘돈을 가마니로 긁어모은다’라고 일컫는 것도 가마니가 곡식을 갈무리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방아는 들을 몰아내는 도구로도 쓰였다. 새해 첫 쥐날 빈 방아를 찧으면 집 안의 쥐들이 그 소리에 놀라 달아난다고 여긴다. 곡식을 축내는 쥐를 몰아 온전히 곡물을 보존하기를 바란 것이다. 음력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한 해 동안의 두더지 피해를 막기 위하여 절굿공이를 들고 집 안팎이나 밭을 돌면서 “두더지 잡자!” 하고 반복해서 외치고 다니며 땅을 찧는다. 두더지는 밭은 물론이고 밭작물에도 피해를 주기 때문에 한 해에 두더지의 피해를 막고 풍년을 바란 것이다.

개업이나 이사를 하였을 때 코뚜레, 멍에를 대문 위에 걸기도 한다. 코뚜레를 거는 이유에 대해 주인들은 ‘귀신 들어오지 말라고’ 그 이유를 댄다. 코뚜레가 힘센 소를 꼼짝 못 하게 무서운 힘을 발휘하듯 감히 잡귀가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코뚜레는 수소가 사용하였던 것을 걸면 벽사적 의미가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고 본다. 장사하는 집에 거는 코뚜레는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의미도 있다. 소는 집안의 큰 재산으로서 부의 상징이며, 그 재산을 코뚜레가 꽉 잡아주어 장사가 번창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예전에는 소는 팔아도 코뚜레는 물론 고삐도 주지 않았다. 만약 고삐를 줄 경우 다시 소를 키우면 그 소가 자주 병이 나고, 집안의 재산이 딸려 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비록 복을 상징하는 소는 팔았어도, 고삐는 여전히 집안에 복을 잡아두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남부지방에서는 괭이를 새해 들어 처음 열리는 장에서 사지 않는다. 땅을 파헤치는 연장이므로 복이 달아난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기우제와 농기구

디딜방아, 키 등은 기우제의 도구로 쓰였다. 영남지방에서는 가뭄이 계속되면 마을 부녀자들은 상복으로 갈아입고, 다른 마을의 디딜방아를 훔쳐 곡을 하면서 모래사장에 방앗다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세운다. 그리고 방앗다리에는 속옷이나 피 묻은 치마를 걸쳐둔다. 그러면 하늘이 부정한 피를 씻어내기 위해 비를 뿌려줄 것이라고 여긴다. 또는 방아는 두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를 나타내고, 하늘이 정액인 비를 뿌려주기를 바라는 주술적인 행위로 보기도 한다.

곡식을 까부르는 키도 기우제의 도구로 전국적으로 쓰였다. 가뭄이 들면 여인네들은 냇가에 들어서서 키에 물을 담아 공중으로 흩뿌리면서 “장마요” 소리친다. 이것을 ‘물 까부른다’라고 한다. 경상남도 산청군에서는 물을 까불리면서 곡을 하기도 하는데, 흩어지는 물이 비를 연상시키듯 비를 내리기를 바라는 유감주술적(類感呪術的)인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여인이 곡을 하는 모습은 하늘의 마음을 움직여 비를 뿌려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키로 물을 퍼 올리는 행위는 바로 의 꼬리를 물에 담근다는 의미를 가지며, 키는 28수의 별자리 중 하나로서, 그 모양은 용의 꼬리를 닮았다. 그러므로 수신(水神)인 용의 꼬리를 건드려 비를 재촉시킨다는 교감주술적 성격이 보인다.

기우제에 빠지지 않는 복식이 도롱이이다. 기우제를 지낼 때는 도롱이를 입는 것이 일반적인데, 도롱이는 비 오는 날 입는 옷으로, 비가 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도롱이를 입고 춤을 추는 것은 비가 내리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주4에 벼가 잘 익어가기를 바라는 주5 때도 도롱이를 입고 제를 지낸다.

평생 의례와 농기구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 겪는 일련의 의식 속에서도 농기구들이 등장한다. 기자 풍속에서, ‘임산부가 체를 넘거나 디딜방아를 깔고 앉으면 12달 만에 아이를 낳는다’, ‘여자가 쌀 찧는 절구 위에 앉으면 이가 비뚤어진 아이를 낳는다’라고 한다. 이것은 임산부에게 힘든 일을 시키지 못하게 하려고 만들어 낸 조상의 지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임산부가 아이를 낳지 못할 때는 키나 체를 바로 놓으면 순산한다고 여긴다. 비정상이던 것이 정상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지겟작대기와 디딜방아도 산속(産俗)에서 금기의 대상물이다. 산모에게 작대기를 만지게 하면 ‘육손’을 가진 아이를 낳는다고 믿는다. 실제로는 산모에게 고된 일을 시키지 말라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

농기구를 다루거나 만드는 능력을 보고 성인의 잣대로 삼기도 하였다. 쟁기질을 할 줄 아느냐에 따라 머슴의 대접이 달라졌는데, 오늘날 성년식과 같은 의미가 있다. 또한, 농촌의 젊은이가 장가들만 한 자격의 기준을 쟁기 부리는 기술에 두었던 것은 쟁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장가 못 간 총각들에게는 ‘연장이 나빠서 못 간다’라고 놀리기도 한다. 쟁기 부리는 기술이 부족해서 가족들에게 밥 먹일 생활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멍석을 짜는 재주도 상머슴과 중머슴을 가름하는 잣대 구실을 하였다. 다른 일을 아무리 잘해도 멍석을 짜지 못하면 그만큼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멍석을 짜는 일은 쉽지 않아서 전문 기술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공전을 내어 마련하는 집도 적지 않았다. 이것을 짤 때는 볏짚을 한 다발씩 묶어서 물을 듬뿍 축인다. 한나절쯤 말아두었다가 메로 가볍게 두드려서 부드럽게 만든다.

호남지방에서는 똥장군을 지는 일을 성인식의 한 가지로 삼기도 하였다. 똥장군은 이쪽저쪽으로 흔들리기에 물지게처럼 균형을 잡지 않으면 쉽게 넘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에 몸을 잘 가누는 재주가 필요하다. 어린아이가 똥지게 지고 가는 과정을 보인 뒤에야 어른 머슴 대접과 함께 새경도 제대로 받았다.

키는 죽은 망자를 저세상으로 잘 보내기 위해 행하는 굿에서도 보인다. 전라도의 씻김굿에서 키에 밀가루를 담고 평평하게 고른 다음 천으로 덮어둔다. 굿이 끝난 후 키 안을 들여다보아 밀가루에 사람 발자국이 있으면 죽은 이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 증거로 여긴다. 경기도 이천에서도 주6과 망자의 옷을 키 위에 올려놓는다. 이때 키는 사자(使者) 또는 망자의 혼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농기구는 망가지거나 낡아도 불에 태우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혼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림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지게로 옮겼고, 그 자리에서 불을 태워버려 나쁜 액운이 집으로 따라오는 것을 막았다. 무덤을 만들 때 쓴 가래도 집으로 가져오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지겟가지는 집 안으로 향하도록 놓지 않는다. 이것은 집 안에 산송장을 치어야 한다는 고려장 풍속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불효의 의미가 있다.

놀이와 주술에 등장하는 농기구

농기구들은 놀이도구로 이용되기도 하고, 점을 치는 도구로도 쓰였다. 특히 목동들은 지게, 낫, 갈퀴 등을 가지고 놀이를 즐겼다. 지게는 놀이도구이자 악기로 등장하기도 한다. 지게로 동채를 만들어 ‘동채싸움’을 벌였고, 비탈진 곳을 지게를 타고 누가 먼저 빨리 내려오는가 ‘지게타기’ 시합을 하였다. 지겟가지에 올라서서 상대편을 넘어뜨리거나 일정한 지점까지 먼저 도착하는 내기 시합을 벌였다. '지게 시집보내기'라 하여, 첫 세장에 감아 둔 주7를 손에 쥐고 돌려 마찰에 의해 연기를 먼저 피우는 내기를 하였다. 그리고 지게 몇 틀을 모아 상여를 꾸미고 이를 어깨에 메고 상여 나가는 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지게의 목발은 타악기로 변하여 나무하러 가는 사람들은 작대기로 목발을 치면서 자신의 슬픔을 달래기도 하였다.

낫과 갈퀴는 내기 놀이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여름철에 나무하러 간 소년들이 벌이는 ‘ 낫치기’가 그것이다. 나무를 네 움큼씩[1전] 모은 후 일정한 거리에서 낫을 던져 땅에 박히면 승리하는 것이다. 이 밖에 5m 떨어진 곳에 줄을 긋고 낫을 던지되, 공중에서 돌아가는 수가 많은 쪽이 이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낫이 땅에 꽂히지 않거나 줄 안쪽으로 떨어지면 실격이 된다. 산에 마른 잎을 긁으러 갈 때, 여러 사람이 갈퀴를 세워 돌린 후 갈퀴가 엎어지면 승리하거나 지는 것이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갈퀴의 엎어진 후의 모양을 선택, 결정한 후 놀이를 시작한다. 즉 갈퀴가 엎어지면 이기는 것으로 결정하면 엎어진 사람이 이기는 것이며, 엎어진 사람이 몇 명인 경우에는 승패가 날 때까지 계속한다. 내기에 거는 잎나무는 갈퀴와 한 손으로 껴안을 정도의 양으로써, 그것을 ‘한 전’이라고 말한다. 한 짐이 되려면 여덟 전이 모여야 한다.

낫은 날카로우므로 위험한 도구로 여겨진다. 비록 낫이 직접 몸에 닿지 않아도 사람을 겨누면 상대에게 해를 끼친다고 여겼다. 낫으로 사람을 겨누다가 살이 내리면 그가 죽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것은 낫을 조심스럽게 사용하라는 의미가 내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낫은 보복을 가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도둑을 맞았을 때, 마당에 사람 형상을 그려 놓고 가슴에 낫을 꽂아두면 그가 죽는다고 한다.

말라리아, 장티푸스, 소화불량, 결핵성 임파선염, 콜레라 등의 질병을 고치는 주술 가운데 양기(陽氣)에 비유되는 농기구를 이용하였다. 말라리아에 걸리면 절굿공이를 태워 그 재를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서 마시거나, 절굿공이를 거적에 싸서 새끼로 일곱 군데를 묶어 사람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통로에 버렸다. 이때의 공이는 남자의 성기를 나타내며, 새끼로 묶은 것은 화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남근(男根)의 강한 양기의 힘으로 음(陰)의 상징인 질병을 몰아내려는 주술적인 사고가 배 있다고 볼 수 있다. 장티푸스와 콜레라 등 전염병이 돌 때 여자들이 디딜방아 공이를 뽑아 진흙을 칠 한 다음 마을 바깥쪽을 향해 세워두거나 다른 마을의 절굿공이를 훔쳐 마을 입구에 세워두면 들어오지 못한다고 여긴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또한 남근을 상징하는 절굿공이를 여자들이 세웠을 때 그 주술적인 힘이 생긴다고 보았다.

황해도 지방에서는 소화불량으로 복통, 토사 등이 발생하면, 절구 속에다 물 두 바가지를 넣고, 절굿공이로 세 번 찧고 그 물을 마신다. 이때, 절구와 물 두 바가지는 음을, 절굿공이와 절구질 세 번은 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음양의 조화를 통해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안의 물이 정액과 같은 힘을 발휘한다.

우리나라 관동, 관북 지방에서는 정월 보름날 남근이 가장 큰 총각[首總角]이 벌거숭이가 되어 목우나 토우를 몰고 밭갈이 의식을 통해 풍년을 비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을 ‘나경(裸耕)’이라고 한다. 나경 풍속은 조선시대 유희춘(柳希春)『미암집(眉巖集)』에 “매년 입춘 아침에 관문(官門)의 길 위에서 목우를 몰아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여 풍 · 흉년을 점치고 풍년을 기원한다. 이때 밭을 가는 자와 씨를 뿌리는 자는 옷을 벗게 한다”라고 적고 있다.

옷을 걸치지 않은 숫총각이 밭을 가는 것은 성적 모방 주술 행위를 통해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다. 즉 여자를 상징하는 토지를 옷을 걸치지 않은 건장한 남자가 쟁기로 땅을 가르는 것은 성행위를 묘사한 것이다. 아직 개간하지 않은 땅을 ‘처녀지(處女地)’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또한 옷을 걸치지 않은 사람이 ‘씨’를 뿌리는 것은 정액을 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나경 풍속은 우리나라 대전에서 출토된 ‘농경문청동기(農耕紋靑銅器)’에서 따비질 하는 사람의 발달한 남근을 통해서도 청동기시대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농의 상징적인 농기구

농민이라고 해서 모든 농기구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농가의 살림 규모에 따라 농기구의 숫자가 다르며, 고가(高價)의 농기구들은 서민들은 그저 쳐다만 볼 뿐이다. 농토가 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불필요한지 모른다.

연자매, 물방아, 우마차, 나락뒤주, 쟁기 등은 부잣집임을 나타내어주는 대표적인 농기구이다. 연자매나 물방아를 쓴다는 것은 찧을 곡식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마차를 쓴다는 것도 많은 곡식을 운반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연자매를 마을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도 개인이 소유하기 어려움을 해결한 것이다. 갈무리를 하는 뒤주의 경우도 나락뒤주가 있다는 것은 농사를 많이 짓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다양한 종류의 쟁기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많은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볼 수 있다.

연자매나 우마차, 쟁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소가 필요하다. 소는 부잣집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귀중한 노동력으로 일반 농가에서는 소유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가난한 농가에서는 주인 소를 빌려다가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거나 소품앗이로 빌려 사용하였다.

국가민속문화유산이 된 농기구

농기구 가운데 몇몇은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하였다. 강원특별자치도 삼척 대이리 통방아[1989], 제주 애월 말방아[1975], 보부상 유품인 촉작대기[1973] 등이 바로 국가민속문화유산이다. 삼척 대이리 통방아는 1992년 전까지 보리 · 수수 · 고추 · 콩 등을 찧는 데 사용하였으나 장마로 유실되었다. 제주 애월 말방아는 마을 공동소유로, 연자매를 말로 돌렸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애월읍의 말방아는 늦봄에 수확한 보리와 가을에 수확한 조를 탈곡하는 데 주로 사용하고, 말방아의 운영, 보수를 위해 ‘계’를 만들었다. 촉작대기는 보부상이 휴식을 할 때 사용한 작대기로 단단한 참나무로 만들어 사람의 체중과 짐의 무게를 버틸 수 있게 하였다. 부여 보부상이 사용한 촉작대기의 위쪽 부분에는 용 문양을 새겨 일반 촉작대기와 그 위용이 다름을 나타내었고, 이 때문에 ‘용장(龍杖)’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의

우리 농기구의 특징은 다양성, 능률성, 견고성을 강조한다. 다양성은 같은 기능을 하는 연장임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이고 그 하나하나의 형태 또한 천차만별하다. 이것은 농구가 그만큼 발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며, 쟁기, 호미, 지게, 삶는 연장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에는 다양한 쟁기가 존재하고, 그 용도가 다르다. 밭갈이 및 골을 타거나 작물 쪽에 흙을 모아줄 때 사용하는 ‘ 극젱이’, 중부 이북 지방에서 논, 밭갈이에 사용하는 ‘연장’, 골을 째거나 김매기에 사용하는 ‘ 후치’, 황해도에서 물이 괴어 있는 논갈이에 사용하는 ‘무리’, 물을 가둔 논의 가을갈이 때 사용하는 ‘평보’, 함경도 일대에서 이랑을 높게 짓는 ‘가대기’ 등이 있다. 또한 보습을 퍼 올린 흙밥을 반전시키는 ‘볏’의 장착도 쟁기에 따라 달리하였고, 소 한 마리와 두 마리가 견인하는 쟁기의 크기와 형태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 경기도 포천군 운천면 겨리쟁기에는 보습에서 말려 올라온 흙밥을 왼쪽으로 떠넘기기 위해 보습 위에 귀를 달았고, 술이 물에 젖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쇠판을 덧대었다. 가대기 바닥 몸체 좌우에 ‘붓살’이라는 장치를 달아 밭의 흙을 다지면서 수분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호미는 비록 작고 가볍지만 비대칭 역삼각형의 날을 가진 독특한 구조로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 호미는 크게 논호미와 밭호미로 구분되는데, 일반적으로 논호미가 밭호미보다 날이 크다. 논호미는 재배 조건이 같은 논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모양이나 기능의 차이가 없지만 밭호미는 매우 다양하다. 밭호미는 사용하는 지역의 토양과 기후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른 모양과 기능을 가지는데, 비가 많은 곳은 ‘외귀호미’를 쓰고, 비가 적은 곳에서는 ‘양귀호미’를 많이 사용한다. 이러한 차이는 비가 많은 곳은 풀뿌리가 땅속 깊이 박히기 때문에 끝이 뾰족하고 가벼운 외귀호미가 좋고, 반대로 건조한 지역에서는 뿌리가 얕아 넓은 날로 땅을 긁어만 주어도 풀이 뽑히기 때문에 날이 넓고 무거운 호미를 쓴다. 땅에 돌이 많은 제주도에서는 호미 날의 폭이 좁고 아주 날카로운 독특한 호미를 쓰는데, 이것을 ‘골갱이’ 또는 ‘낫’이라고 부른다. 육지와 달리 호미와 낫을 반대로 호칭한다.

지게는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운반 도구이다. 산촌, 어촌, 평야 지역마다 그 형태와 용도가 다른데, 그 유형이 17가지에 이를 정도이다. 지게로 나르는 대상 또한 너무나도 다양하다. 농촌의 한 가정을 보더라도, 봄이면 거름, 찐모, 가을이면 볏짚이나 쌀가마니, 겨울이면 꼴이나 나무를 지게로 날랐다. 어촌 지역에서는 해초나 물고기를, 산간 지역에서는 나무, 수확물, 돌 등을 날랐다. 이밖에도 장사꾼들은 물건을 실어 옮겼고, 공사판의 일꾼들도 벽돌 등의 건축자재를 날랐다. 지게는 물건뿐만 아니라 병자나 노인, 어린이 등 사람을 나르는 데도 이용하였다. 어느 물건이든 운반할 수 있는 다목적 도구였다. 많은 문물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지만 지게만큼은 우리 민족의 발명품이다. 물론, 중국에서도 우리와 유사한 지게를 쓰지만, 한정된 일부 지역과 소수민족만이 사용하고 있으며, 지겟가지가 없다.

땅을 삶아서 판판하게 고르거나 바닥을 다지는 데에 쓰는 연장도 써레를 비롯하여 평상써레 · 번지 · 밀번지 · 매번지 · 통번지 · 살번지 · 발번지 · 남태 · 돌태 · 주8 · 나래 · 못발 · 곰방메 · 고무래 · 발고무래 등 17가지나 되며, 끙게 하나만 해도 형태가 매우 다른 것이 10여 종 포함된다.

한국의 농기구 가운데는 지역성이 강한 것도 존재한다. 씨 뿌릴 골을 타는 데 사용하는 ‘고써레’는 경상북도 산간 지역에서만 사용하고, 밭에 파종을 한 후 씨앗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땅을 다져주는 ‘남태’는 제주도 조밭에서 사용한다. 조 파종 도구인 ‘ 드베’는 함경도 밭농사 지역에서만 사용한다. 전라북도 익산의 쟁기지게는 쟁기를 운반하기 위한 전문 지게이다.

우리나라 농기구는 능률성을 고려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호미를 들 수 있다. 잡풀 하나라도 모두 제거하는 한국의 호미는 2018년 이후 아마존을 통해 미국, 영국, 캐나다 등 7개국에 수출되기 시작하였고, ‘아마존의 선택[Amazon’s Choice]’에 선정되어 높은 호응을 보였다. 호미는 중국에서도 사용하지만 호미 날이 평면이라서 사람이 선 채로 풀을 긁어내는 정도라면, 한국의 호미 날은 날카로워 눈으로 보이는 모든 풀을 제거할 수 있다. 외국인이 한국의 호미를 선호한 것은 바로 높은 능률성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농기구 제작에 적합한 형태를 가진 한가지 나무를 선택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면 농기구가 견고하다고 여긴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게와 디딜방아를 들 수 있다. 지게는 보이는 대로 지겟감이 될 수 있는 나무를 잘라다가 집에 보관하였다가 짝을 지어 한 틀씩 제작하였다. 후에 지겟감을 구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쪽지게를 만들었지만 제가지지게를 선호한다.

한국의 디딜방아는 양다리 형태이다. 외다리 디딜방아가 재목을 고르거나 만들기도 쉽지만, 구하기 어려운 양다리로 디딜방아를 만들어야 방아가 튼튼하다고 여긴다. 또한 양다리는 여러 사람이 협동으로 방아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방아의 효과도 높고, 노동의 피로감도 덜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광언, 『동아시아 농기구 상징사전』(민속원, 2022)
정연학, 『한중농기구 비교연구: 따비에서 쟁기까지』(민속원, 2003)
김광언, 『한국농기구고』(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논문

정연학, 「농기구에 반영된 한중 문화 비교」(『비교연구를 통한 한국민속과 동아시아』, 민속원, 2004)
주석
주1

논밭을 갊. 우리말샘

주2

지게나 걸채 따위의 두 짝이 함께 짜여 있도록 가로질러서 박은 나무. 우리말샘

주3

낫의 하나. 모양은 보통 낫과 같으나 등이 날이 되고 자루가 길게 생겨 풀을 밀어서 깎는 데 쓴다. 우리말샘

주4

우리나라 명절의 하나. 음력 유월 보름날이다. 신라 때부터 유래한 것으로, 나쁜 일을 떨어 버리기 위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 풍속이 있었다. 근래까지 수단(水團)·수교위 같은 음식물을 만들어 먹으며, 농사가 잘되라고 용신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우리말샘

주5

음력 유월 용날이나 유둣날 또는 칠월 칠석에 용왕에게 지내는 제사. 농가에서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 달라고 지낸다. 우리말샘

주6

초상난 집에서 죽은 사람의 넋을 부를 때 저승사자에게 대접하는 밥. 밥 세 그릇, 술 석 잔, 백지(白紙) 한 권, 명태 세 마리, 짚신 세 켤레, 동전 몇 닢 따위를 차려 담 옆이나 지붕 모퉁이에 놓았다가 발인할 때 치운다. 우리말샘

주7

지게에 짐을 얹고 잡아매는 줄. 우리말샘

주8

씨앗을 뿌린 뒤에 씨앗이 흙에 덮이게 하는 농기구. 가마니때기에 두 가닥의 줄을 매고 위에 뗏장을 놓고 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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