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직(綿織)은 목화에서 면실을 자아 면직물을 짜는 기술이다. 면직물은 목(木), 면포(綿布), 목면(木棉) 등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일반에서는 ‘무명’ 또는 ‘미영(명)’, ‘미영베’ 등으로 불리었다. 면은 아욱과의 목화 종자에 붙어 있는 섬유로 보통 종자모섬유(種子毛纖維)라 한다. 목화에는 수목(樹木), 관목(灌木), 초목(草木) 등이 있는데, 오늘날 일반적으로 널리 재배되는 면은 일년생의 초면이다. 우리나라에서 종식된 면화는 대부분 흰색이지만 노르스름한 갈색을 띠는 황색 목화도 전라도 일대에서 오래전부터 재배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면직이 시작된 시기는 삼국시대부터이며 당시에는 백첩포(白疊布)로 명명되었다. 백첩포는 중앙아시아의 면직물 명칭을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길패, 고패와 더불어 고대 면직물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한원(翰苑)』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백첩포(白疊布)를 만드는데 청포(靑布)가 특히 아름답다.”라고 하였다. 또한 신라에서는 사십승(四十升)에 이르는 섬세한 백첩포(白氎布)를 당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삼국시대 면직물은 부여 능산리 사지 백제시대의 유적에서 발굴되어, 문헌에 기록된 면직물 제직 기록을 실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면의 재배가 본격화된 것은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12년(1363) 문익점이 교지국(交趾國)에서 새로운 면 종자를 반입하면서부터이다. 교지국은 현재의 베트남 지역으로, 일찍부터 목화를 재배하고 면직물을 제직하였다. 그 중에서 문익점이 반입한 면 종자는 국내의 기후와 토양 조건에 적합하였다. 이후 전국적으로 면직물 재배가 급속도로 확산하였다.
태조 6년(1398)의 기록에 따르면 “… 호승(胡僧) 홍원(弘願)의 힘을 빌고 가비(家婢)에게 실 뽑고 무명 짜는 기법과 기구(機具) 조작법을 터득하게 하여 무명 한 필을 짜내기에 성공하였다. 이윽고 이웃들과 서로 배우고 익히게 되어 10년이 못 가서 목화의 재배, 무명짜기의 기법은 향내에 퍼지고, 또 10년이 못 가서 일국 안에 번져 나갔다.”라고 하였다. 『궁중발기(宮中撥記)』에는 세목(細木)으로 이름난 지역으로 경주, 창원, 상주, 진주, 밀양, 거재, 거창, 하동, 고성, 초계, 청도, 영천, 예천, 금산, 함양, 합천, 영덕, 개성, 의령, 문경, 고령, 현풍, 영일, 창령 등을 언급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고양(高揚)의 세면포,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문경의 세목이 유명하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육의전 중에는 면포전(綿布廛)이 있어 면포를 전담 판매하였으며, 후에는 백목전(白木廛), 은목전(銀木廛)이라고도 하였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의하면 당시 324개의 시장 중 면포는 240개소, 삼베는 139개소, 주(紬)는 60개소, 모시는 40개소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시장에서 유통되는 직물 중 면직물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오면서 기계직 면포인 광목, 옥양목 등이 대량 수입되고, 국내에서도 기계직 면포의 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나라 재래의 수공 면직물 생산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면직은 면실을 만드는 과정과 면직물 제직 과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면실 만드는 과정은 씨 앗기, 솜타기, 고치 말기, 실잣기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면실 만들기에 사용되는 도구는 씨아, 솜활, 고치 말판과 말대, 물레 등이다. 수확한 목화는 잘 말린 후 씨아를 사용해 목화 속의 씨를 빼낸다. 씨를 뺀 목화는 채로 두드려 잡물을 제거하고 솜활로 타서 섬유를 피어나게 한 후 고치 말기를 한다. 면고치가 준비되면 물레로 실잣기를 한다. 먼저 면고치의 끝을 비벼 꼬아 섬유를 뽑아내면서 실 머리를 만들어 물레의 가락 끝에 고정시키고, 면고치를 왼손에 들고 물레의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물레줄이 돌면서 가락이 따라 돈다. 이때 왼손 엄지와 검지로 면고치를 풀어 주며 위로 살며시 올리면 섬유가 뽑아져 나오면서 마찰력에 의해 길이 방향대로 정렬되고, 가락의 회전에 의해 섬유가 합쳐지면서 꼬임이 주어져 실이 만들어진다. 목화솜의 품질과 작업자의 숙련도에 따라 고운 세목을 짤 수 있는 무명실을 자을 수 있다.
무명짜기 과정은 베뽑기, 베날기, 베매기, 베짜기 순으로 이루어진다.
베뽑기, 베날기는 짜고자 하는 무명의 샛수와 필수에 맞추어 날실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고무래 구멍에 끼워진 무명실 10올을 한꺼번에 모아 쥐고 뽑아내어 광주리에 사려 담는데 이 과정을 베뽑기라 한다. 베날기는 베뽑기로 준비된 10올 단위의 실을 모아 쥐고 길이와 샛수에 맞추어 날기하는 과정이다. 명주, 삼베, 모시 짜기의 베날기에서는 새 쫓기를 하여 날실을 잉아올과 사올로 사침을 짓는 과정이 있는데, 면직에서는 이 과정이 생략되고 10올씩 교차시켜 사침을 짓는다.
베날기가 끝나고 나면 중간 부분 말뚝에서 실을 잡아 올려 고리를 만들며 사려 감아 실이 엉키지 않게 한다. 날기가 끝난 면실 타래는 뜨거운 풀물에 담가 풀을 먹여 실에 강도를 높인다. 풀이 마른 날실은 베매기 전에 바디끼우기를 하는데 바디 1구멍에 날실 2올씩을 끼우며 바디 뒤의 10올씩 구분한 사침을 바디 앞으로 새를 몰면서 사올 1올, 잉아올 1올로 사침을 새로 짓는다. 바디끼우기와 새몰기가 끝나면 사올과 잉아올 사이에 사침대를 끼우고 ‘⊃’자형으로 돌아가 있는 실끝에는 ‘톱맞이’라고 부르는 대나무 막대기를 끼운다.
베메기 과정은 날실에 풀을 먹여 도투마리에 감는 과정이다. 소용되는 도구는 들말, 끄싱개, 도투마리, 톱맞이, 톱잽이, 뱁댕이, 풀솔 등이다. 날실을 매단 도투마리는 들말 위에 올려 놓고 나머지는 끄싱개 말뚝에 묶는다. 풀솔로 날실에 풀을 바르고 손으로 비벼 주어 골고루 풀이 잘 스미도록 한다. 날실 아래에는 벳불을 피워 풀 먹인 날실이 잘 마르도록 하며 다 마른 날실은 도투마리에 감는다. 이렇게 하면 베를 짜기 위한 날실 준비가 끝난다.
씨실은 전대에 감아서 꾸리를 만들어 준비한다. 씨실을 감는 방법은 실뎅이에서 실 가닥을 잡아 전대의 ‘V’자형 홈에 걸어 준비하는데 전대를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는 실이 풀려 나오는 정도를 조절한다. 처음에는 가운데 부분에 여러 번 돌려 감고 나서, 다음에는 왼손을 전후좌우로 ‘8’자로 돌려가며 실을 감는다. 꾸리는 사용 전 물에 넣어 삶아서 사용한다.
날실과 씨실이 준비되면 베틀을 조립하여 준비하는데 이를 ‘베틀 차린다’라고 한다. 베매기를 마친 도투마리를 직기 위로 올린 다음 잉아를 만들고 비거미를 사올과 잉아올 사이에 끼운다. 베짜기는 비거미에 의한 자연 개구와 잉아에 의한 역개구로 직조가 이루어진다. 무명을 짜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면 직조자는 베틀에 앉아 부테를 허리에 감고 바디, 잉아, 비거미 등이 직물을 짜기에 적당한 위치에 놓이도록 하며 날실이 고르게 정렬되도록 정리하고 바디에 바디집을 끼운다. 베를 짤 때는 몸으로 날실을 잡아당기는 장력과 신발을 잡아끄는 정도가 잘 맞아야 하며, 북을 넣고 바디를 치는 동작이 자연스럽게 연속되면서 베가 짜여진다. 일정한 길이의 직물을 짜고 나면 말코[布捲具]에 직물을 감고 다시 도투마리를 돌려 날실을 풀어 준다. 세목을 짜기 위해서는 정교한 솜씨와 오랜 기간의 숙련이 필요하다.
제직이 완료되고 직기에서 내린 무명은 약간 누런색을 띠며 부서진 목화씨 껍질이 중간에 섞여 있어 거뭇거뭇한 티가 남아 있다. 이 무명베를 생목(生木) 또는 생면포(生綿布)라고 한다. 생목은 잿물에 삶아 내거나, 잿물에 담갔다가 쪄서 햇볕에 바래는 정련 과정을 거치면 하얗게 표백되어 백목(白木)이 된다.
면직 기술은 현재 전라남도 나주와 경기도 양주에서 기능이 전수되고 있으며, 국가에서는 무명짜기의 전승을 위하여 1969년 전라남도 나주 지역의 ‘나주 샛골나이’를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