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낭혜화상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寶光塔碑)의 비문에 그의 행적의 일부분이 나타나 있다. 즉, 881년(헌강왕 7)에 문한직(文翰職)인 시독한림(侍讀翰林)으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아 낭혜화상을 전송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계원유향(桂苑遺香)』의 주(註)나 조선 후기 이덕무(李德懋)의 문집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따르면, 당시 그는 시독한림랑 겸 숭문대서서원직학사(侍讀翰林郎兼崇文臺瑞書院直學士)로서 살찬(薩飡)의 관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왕의 불교 신앙이 돈독했던 것도 이유가 되겠으나, 당대의 왕권은 매우 취약해 종교 세력자인 선종(禪宗)의 조사(祖師) 낭혜에 대해 지극한 예우를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궁궐에 들렀던 선사를 전송하게 된 헌강왕은 그 이별을 아쉬워해 학자들로 하여금 전송의 시를 짓도록 하였다. 이에 왕손인 억영(嶷榮)이 먼저 시를 짓고 이어 박옹이 증행시(贈行詩)의 서문을 지었다.
그런데 이 서문이 『청장관전서』의 「한죽당섭필상(寒竹堂涉筆上)」에 전하고 있다. 내용은 대사(大師)의 행장을 노래한 것인데, 특히 신라 왕실과의 두터운 교분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덕무는 이 글을 평하기를, “영영(英英)한 정채(精彩)는 없으나 오히려 당나라 문체의 전형(典型)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와 통일신라시대 도당 유학의 유행 등을 생각해 보면, 박옹은 최치원(崔致遠) 등 당시의 문사들처럼 당나라에 유학해 학문을 했던 육두품(六頭品)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헌강왕의 측근에서 문필에 관한 일을 담당하며 왕을 보필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