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암(普照庵)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의 송광사(松廣寺)에 딸려 있었던 암자이다. 창건 관련 내용은 1207년(희종 3)에 최선(崔詵)이 왕명을 받들어 찬술한 「대승선종조계산수선사중창기(大乘禪宗曹溪山修禪社重創記)」에서 찾을 수 있다. 명종 대 지눌(知訥: 1158~1210)이 공산 회불갑에 있을 때 문도 수우(守愚)에게 안선처를 찾도록 하였다. 이에 수우가 길상사 즉 현재의 송광사를 찾아냈다. 1197년(명종 27)에 공사를 시작하여 1200년(신종 3) 지눌이 이석하였으며, 건물을 100여 칸으로 넓혀 1205년(희종 1)에 공사를 마쳤다. 이때 희종은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길상사를 수선사로 개칭하였다. 보조암은 대략 1200년에서 1210년 사이 지눌의 말년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시기 지눌이 주석한 암자의 명칭이 ‘보조암’이었는지는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한편, 지눌은 송광산 길상사로 이석하면서, 현 대웅전 뒤쪽 대상(臺上)의 건물인 수선사(修禪社)에 주석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보조암은 지눌의 말년 주석처로 활용되었거나 입적 이후 추모를 위해 창건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지눌이 입적한 후 영정을 봉안하면서 시호에 의거하여 ‘보조암’이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보조암의 명칭이 기록상 처음 확인되는 것은 영월(詠月) 청학(淸學: 15701654)의 『영월당대사문집(詠月堂大師文集)』으로, 1624년(인조 2) 나한상을 중수한 기록에서 보조암을 언급하였다. 또한 취미(翠微) 수초(守初: 15901668)의 『취미대사시집(翠微大師詩集)』에 “차총장노제보조암운(次聰長老題普照庵韻)”이 있고, 영해(影海) 약탄(若坦: 1667~1754)의 『영해대사시집초(影海大師詩集抄)』 등에서 보조암의 명칭이 확인된다.
지눌의 보조암 창건설은 18세기19세기 송광사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다소 후대의 기록이지만 1727년(영조 3)에 벽오(碧梧)가 지은 「보조암중창기(普照庵重創記)」에, ‘사찰 유기(遺記)에 의거하여 지눌이 1200년 이전에 암자를 짓고 보조암이라 칭하였다’는 간략한 기록이 보인다. 또한 조선 후기 문신 홍석주(洪奭周 :17741842)는 「송광사유산록(松廣寺遊山錄)」에서 ‘보조암은 지눌이 처음 주석한 곳[卓錫之所]’이라고 하였다.
보조암은 송광사의 산내 암자 가운데 ‘본암(本庵)’이라 불리고 있으며, 이외에 동암의 은적암, 서암의 광원암, 남암의 묘적암, 북암 등 다수의 암자가 확인된다. 고려시대 송광사의 16국사 등 고승의 승탑과 그와 관련한 암자의 성립 및 전개 등에 대해 향후 검토가 필요하다.
보조암은 지눌의 말년에 창건된 절이라고 추정되지만,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운영이나 중창의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천자암과 함께 보조암 등이 소실되었다. 이에 1606년(선조 39) 응선(應禪)이 주도하여 화사(化士) 영기(靈機) 등과 함께 1609년(광해군 즉위년)에 법당을 중건하였고, 불구(佛具) 등을 새로 갖추었다. 1660년(현종 즉위년)에는 유영(柳影)이 청원루(淸遠樓)를 신창하였다.
그 후 건물이 노후되자 1726년(영조 2)에 청인(淸仁)이 동지 21인과 함께 보조암의 보전(寶殿) 정당(正堂), 동각(東閣), 원응방(圓應房) 등을 중수하였고, 1771년(영조 47)에는 별좌 교안과 도감 사원이 보조국사 영각을 중수하였다. 1866년(고종 3)에는 화주 화성(華性)에 의해 중수되었고, 1905년(광무 9)에는 용선장로(龍船長老)가 보조암 청원루와 정당(正堂)을 중수하였다. 이로 보아 보조암은 정당인 보전 이외에 동각, 원응방 등이 부속되었고, 특히 누각인 청원루를 갖춘 소규모의 암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융희 2)에는 일본군의 방화로 보조암이 폐허가 된 일이 있었다. 이후 피화와 중창을 거듭하며 명맥을 이어 오다가 한국전쟁 때 전소된 뒤 다시 복원하지 못하였고, 현재는 암자 터만 남아 있다.
보조암은 고려 후기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송광사의 암자 중 ‘본암’이라 불리고 있다. 지눌은 당시 폐사였던 지금의 송광사 일원을 정혜결사처로 정하여 중창하였는데, 그가 수행한 정혜결사의 성립과 전개의 중심처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나아가 고려 후기 결사 불교의 지방 전개, 결사 불교의 사원 조성 등과 관련하여 보조암의 창건은 의미가 있다. 특히, 보조암은 송광사의 산내 암자와 승탑의 분포와 관련이 있어,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 사암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