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사지 ()

제주 법화사지
제주 법화사지
불교
유적
국가유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이칭
이칭
법화사 터
유적/터
원건물 건립 시기
고려시대
면적
78,120㎡[문화재 구역 72필지]
소재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법화사지(法華寺址)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지정기관
제주특별자치도
종목
제주특별자치도 시도기념물(1971년 08월 26일 지정)
소재지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법화사지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이다. 해발 160m~170m 내외의 넓은 평지에 위치하며, 절터를 중심으로 동쪽에 강정천이, 서쪽에 중문 한천이 흐르고 있다. 법화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82년부터 1998년까지 8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현재 사역 일원에는 새로 조성된 법화사가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과 연지는 복원되어 있고, 기타 건물터는 일부 복원된 상태이다. 법화사지는 역사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1971년에 제주도 기념물[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발굴경위 및 결과

법화사지(法華寺址)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82년1998년 8차에 걸쳐 2만 8050여 ㎡의 면적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제1차 조사는 명지대학교 박물관, 제2차제8차 조사는 제주대학교 박물관이 시행하였다. 제1차 조사는 1982년 7월 16일~1983년 1월 26일에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1071-1번지와 하원동 1066번지를 대상으로 한 지표조사였다. 조사 결과 고려 후기의 금당 터가 확인되었으며, 소수의 도자기 및 기와 편, 용봉문 막새 등이 발굴되었다.

제2차제4차 조사와 제7차제8차 조사는 연지(蓮池) 구역, 제5차제6차 조사는 건물터를 대상으로 하여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하였다. 제2차 발굴 조사는 1987년 7월 10일12월 24일에 약식 조사로 진행하였으며, 이미 조사한 금당 터 위에 가건물로 만든 대웅전을 철거하면서 실시하였다. 동-서 22m, 남-북 16.3m의 건물터 내부 조사를 통하여 초석 등 유구의 파괴가 확인되었다. 제3차 발굴 조사는 1989년 12월 11일~1990년 1월 21일에 서귀포시 하원동 1090번지와 하원동 1076번지 일대 약 5,280㎡를 대상으로 하여 구품연지(九品蓮池)를 확인하기 위해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연지와 관련한 유구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제4차 발굴 조사는 1992년1월2월에 서귀포시 하원동 1091번지 일대 늪지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연지 구역에 대한 2차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늪지와 석축 시설을 확인하였지만, 유구와 유물은 확인할 수 없었다. 제5차 발굴 조사는 1991년 12월 31일1992년 11월 30일에 실시하였다. 서귀포시 하원동 1062-63번지와 하원동 1045번지 일대의 법화사 경내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 조사로 금당 터의 서북쪽 하원동 1062번지에서 건물터와 계단 터 3곳, 보도 4곳, 배수로 2곳, 기와 매립 구덩이 2곳, 담장 터 1곳 등을 확인하였다. 이곳에서 용봉문 막새와 ‘시중창십육년기묘필(始重刱十六年己卯畢)’이라는 글자가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제6차 발굴 조사는 1995년 5월 22일~12월 8일, 제5차 발굴 구역의 서쪽에 연접된 구역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 조사를 통해 청자 편을 출토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고려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2개소를 확인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건물터 5개소와 사찰 외곽 담장 터, 할석 이외에 기와 편과 자기 편 등을 확인하였다.

제7차 발굴 조사는 1997년 2월 12일8월 30일에 서귀포시 하원동 1066번지와 하원동 1067번지 일대를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늪지의 토층과 군 숙영지(宿營地) 관련 시설 유구 등을 확인하였다. 특히, 기와 매립 구덩이 보완 조사에서 ‘범’ 자가 새겨진 막새와 제5차 조사에서 확인된 명문과 연결되는 ‘지원육년기사시(至元六年己巳始)’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전체 명문이 ‘지원육년기사시중창십육년기묘필(至元六年己巳始重刱十六年己卯畢)’임을 확인하였다. 제8차 발굴 조사는 1997년 12월 20일1998년 2월 27일에 서귀포시 하원동 1080-1번지 일대를 대상으로 하였다. 노층 조사 결과 늪 지층은 찾지 못하고 현대의 건물터만 확인하였으며, 출토 유물로 기와 편 및 도자기 편이 나왔다.

법화사지의 발굴 지역은 서귀포시 하원동 1071-1번지 등 총 19개 필지였다. 발굴 조사 결과 제1차 조사에서는 고려 후기의 금당 터가 확인되었고, 제2차~제8차 조사에서는 10개 동의 건물터와 계단 시설, 보도 시설, 담장 터, 연지 등의 사찰 관련 유구와 기타 군 숙영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용봉문 막새와 화문, 범자문 막새, ‘지원육년기사시중창십육년기묘필’, ‘만호(萬戶)’ 등이 새겨진 명문(銘文) 기와, 어골문, 어골 복합문, 무문 기와 편, 청자 편, 분청자기 편, 백자 편, 중국 백자 편, 토기 편, 그리고 ‘법화경전등잔차양사시주주경(法華經前燈盞此樣四施主朱景)’이 새겨진 청동 등잔과 개원통보(開元通寶), 석제 소불(小佛) 등이 있다. 또한 ‘내섬(內贍)’의 글자가 새겨진 분청사기 등과 백자가 출토되어 법화사가 조선 전기까지 일정한 사격을 갖춘 사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발굴 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법화사지의 변천은 4단계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1차 시기[1269년 이전]는 탐라총관부 설치 이전으로, 관련 건물터나 유물은 거의 없고, 이곳에 초막이나 단순한 형태의 건물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2차 시기[1269년~1400년경]는 탐라총관부가 설치된 후 원과 관련한 건물이 신축된 시기로 추정하였다. 또한 2차 시기 유구에서 특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지원육년기사시중창십육년기묘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와 용봉문 막새, 범자문 막새 등이 출토되어 1269년(원종 10)1279년(충렬왕 5)에 중창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 시기에 원대 기와를 얹은 전각에 원나라의 장인이 제작한 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차 시기[1400년1600년경]와 4차 시기[1600년경 이후]는 조선시대로, 이전 시기의 건물이 허물어진 이후 이를 신축에 사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 시기에는 법당과 승방, 부속 건물 등 6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하였다.

법화사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13세기 중엽 혜일이 탐라의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법화사를 찾은 시문이다. 고려 후기 전라도 강진 백련사(白蓮寺)의 진정국사와 교류한 이영(李穎: ?~1277)과의 관련 기록 및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통해 혜일의 유력 시기는 1249년(고종 36)을 전후한 시기였던 것 같다. 이후 1269년, 탐라 성주층 및 지방관이 국가의 전통적 사원 중수 이념 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면서 법화사의 중창을 추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삼별초(三別抄)의 입도와 1274년 일본 정벌 및 대기근 등이 겹치면서 중창이 장기화되었고, 1279년 무렵 중창을 완료하였다.

14세기 전반에는 원나라의 장인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미타삼존불을 봉안하는 전각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충선왕과 탐라군민만호부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된 그의 측근 박경량이 활동한 시기인 1308년1320년, 그리고 고려 출신 기황후(奇皇后)의 불사가 많은 시기인 1330년1350년 사이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법화사는 미타삼존불을 봉안하여 사찰을 장엄하였으며, 원나라 황제와 고려 국왕 등을 기원하는 사원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 법화사는 비보 사원으로서 노비 280명을 소유한 제주의 대표적인 사원이었으나, 1408년(태종 8)에는 노비 수가 30명으로 축소되면서 사세가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1653년(효종 4)에 편찬된 『탐라지(耽羅志)』에는 ‘금폐(今廢)’라는 문구와 함께 주1이 수 칸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금폐’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법화사는 19세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1921년에 법화사에서 동안거 설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절터에 새로 사암을 세워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초에 제주 관음사(觀音寺)의 포교소로 운영되었지만 제주4·3사건으로 소실되었고, 이후 1960년 후반에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법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인 관음사의 말사로 관리, 운영되고 있다.

형태와 특징

법화사지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의 해발 160m~170m 내외의 넓은 평지에 자리한다. 절터를 중심으로 동쪽에 강정천(江汀川), 서쪽에 중문(中文) 한천(漢川)이 흐르고 있다. 사역 뒤편에는 해발 220m의 언덕 능선이 동서로 뻗어 내렸고, 앞쪽에는 해발 165m의 구산봉(龜山峰)이 있다. 현 법화사의 대웅전 뒤편과 동편에는 용천수가 있다.

발굴 유구를 참고하여 법화사지의 형태와 특징을 살펴보면, 발굴지는 크게 건물터 구역과 연지 추정 구역으로 나뉜다. 건물터 구역은 현 대웅전 구역과 그 뒤편 서귀포시 하원동 1046번지 일대이다. 이 구역은 크게 건물터와 건물터 간 보도, 그리고 외곽 담장 터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터는 특수건물터와 일반 건물터로 나뉘는데, 특수건물터는 다른 건물터와 축조 방법, 석재, 성격 등을 달리한다. 특히, 주좌각원(柱座刻圓)의 초석, 지붕에 사용한 용봉문 막새 등이 특징적이다. 건물터 구역의 계단 시설은 북고(北高)-남저(南低)의 지형 차를 해결하기 위하여 5단으로 시설한 계단 석열(石列)이 있고, 계단 간격은 약 1.5m~1.8m이다. 이어 건물터 주변에 보도 시설이 있는데, 석열 보도와 박와(薄瓦) 보도로 구분된다. 대표적인 보도는 북편의 것으로, 특수건물터의 기와로 보이는 용봉문 막새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점이 특징이다.

한편, 외곽 담장 터와 그 밖으로 폐기와 더미가 있는데, 그 규모는 남-북 16m, 동-서 22.6m, 깊이 1m이다. 또한 사찰 전체를 둘렀던 외곽 담장 터와 내부 담장 터가 확인되는데, 남쪽 외곽 담장 터 끝부분에서 초가와 관련한 시설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기타 발굴지 전역에서 1950년대 군 숙영지와 관련한 시설물이 확인되었다. 연지 추정 구역은 건물터 남쪽에 위치하는데, 건물터 구역에서 나오는 수원(水原)이 지형을 따라 흐르면서 늪지가 조성된 곳이다.

법화사의 창건 및 초기 모습을 비롯한 원 건물터는 확인되지 않는데, 삼국시대 해상 교역에 따른 5세기7세기 창건설과 장보고(張保皐) 창건설, 고려 전기인 10세기12세기 창건설, 원 간섭기 원나라인의 창건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현재 발굴 조사 보고에 의하면 건물터는 주로 현 대웅전 지역과 그 후면 북서쪽 하원동 1046번지 일대의 능선 부분을 일부 깎아 남-북으로 배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시기는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해당한다. 현재 법화사지의 사역 일원에서는 새로 조성된 법화사가 운영 중이다. 현 사역 내 대웅전과 연지는 발굴 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되어 있고, 기타 건물터는 일부 복원되어 있다.

의의 및 평가

법화사지는 법화사의 창건과 전개, 폐사를 알 수 있는 역사 유적이다. 법화사는 고려 전기에 비보압승 정책에 따라 비보 사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제주 지역의 동서 및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 요지의 원관 사원으로 기능하였다. 나아가 원 황제 및 고려 국왕을 축수하는 축리 및 기원 사원으로 기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 전기에도 국가의 비보 사원으로 운영되었던 제주도의 주요 사원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에서 귀중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법화사지는 한국 불교의 성립과 발전에 있어서 제주도에 불교가 유입되고 정착하는 과정은 물론, 고려와 원나라 간의 불교문화 교류의 주요 유적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러한 이유로 법화사지는 1971년 8월 26일에 제주도 기념물[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범우고(梵宇攷)』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탐라지(耽羅志)』

단행본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 보고서』(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1)
『제주의 역사와 문화』(국립제주박물관, 2009)
『제주의 폐사지』(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 2004)
『제4회 제주 법화사 학술세미나 자료집』(법화사·법화사복원추진위원회, 2002)
김일우, 『고려시대 탐라사 연구』(신서원, 2000)
『법화사지 제주대학교박물관조사보고』 19(서귀포시·제주대학교박물관, 1997)
『법화사지 제주대학교박물관조사보고』 10(서귀포시·제주대학교박물관, 1992)
『법화사지 발굴조사 보고서』(명지대학교 박물관·서귀포시, 1983)
권상로, 『한국사찰전서』(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논문

박용진,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위상과 역할」(『탐라문화』 74,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2023)
박원길, 「법화사의 비밀」(『몽골리안 서베이(Mongolian Survey)』 3, 단국대학교 몽골연구소, 2013)
조영록, 「제주 법화사 삼존불의 남경 이치와 만공의 입명 전법」(『명청사연구』 35, 명청사학회, 2011)
오상학, 「고려시대 제주 법화사의 역사지리적 고찰」(『국토지리학회』 44-1, 국토지리학회지, 2010)
박현규, 「제주도 법화사 삼존불상과 남경 대보은사의 관계」(『중국사연구』 58, 중국사학회, 2009)
김일우,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중창과 그 위상」(『한국사연구』 119, 한국사연구회, 2002)
황민호, 「13세기 제주도 법화사의 중창에 대하여」(『법화사상과 동아시아 불교교류』,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해상왕국장보고연구회, 2001)
강창화, 「제주 법화사지의 고고학적 연구」(『제주도사연구』 9, 제주도사연구회, 2000)
김동전, 「제주 법화사의 창건과 그 변천」(『탐라문화』 20,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99)
강창언, 「제주도의 불적」(『탐라문화』 12,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92)
문명대, 「법화사의 역사와 의의」(『지방문화재 제주법화사 복원을 위한 학술세미나』, 서귀포시, 1985)
주석
주1

띠나 이엉 따위로 지붕을 인 초라한 집.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박용진(국민대학교 교수, 한국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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