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는 제주특별자치도 남부에 위치한 행정시이다. 일설에 의하면 원나라로 가는 조공선박이 바람을 피하여 홍로천에 정박했다가 서쪽으로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동쪽과 서쪽 및 남쪽은 남해에 면하고, 북쪽은 한라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제주시와 접하고 있다. 한라산이 북풍을 막아주는 병풍 역할을 하여 기후가 온화하며 바람이 적어서 열대작물 재배지로서도 유명하다. 2006년에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면서 혁신도시로 지정되었다. 제주국제자유도시 7대 선도 프로젝트의 하나인 서귀포 미항 건설과 예래동 휴양단지 건설 등이 추진되고 있다.
동쪽과 서쪽 및 남쪽은 남해에 면하고, 북쪽은 한라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제주시와 접하고 있다. 면적은 남제주군과 통합되어 870.70㎢이고, 인구는 16만 4,51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3개 읍, 2개 면, 12개 행정동(22개 법정동), 76개 행정리(50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홍동에 있다.
현재의 제주도는 2006년 7월 1일 이후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 의하여 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가 출범하게 되어, 2행정시와 7읍 · 5면 · 31동 등 43개의 하부지역단위로 행정개편이 이루어졌다.
제주특별자치도의 핵심산업으로는 국책사업으로 영어전용타운조성 추진과 교육경쟁력 강화, 도 전역의 국제회의도시지정(2006년 9월), 의료관광기반조성 등 국제화를 위한 제도개선 및 투자환경조성이 주요 내용이다. 특히,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추진사업으로 서귀포시가 혁신도시로 지정되어 공무원연금관리공단 등 9개 공공기관(34만평 규모)이 이전하여, 지역의 대학 · 연구소 · 산업체 · 지방자치단체 등의 협력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기반을 조성하여 지방도시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려는 계획이 모색되고 있다.
서귀(西歸) · 보목(甫木) · 동홍(東烘) · 토평(吐坪) · 서홍(西烘) · 신효(新孝) · 하효(下孝) · 상효(上孝) · 법환(法還) · 서호(西好) · 호근(好根) · 강정(江汀) · 월평(月坪) · 도순(道順) · 영남(瀛南) · 중문(中文) · 대포(大浦) · 하원(河源) · 회수(廻水) · 색달(穡達) · 상예(上猊) · 하예(下猊) 등 22개 법정동으로 되어 있다
한라산의 정남으로 펼쳐져 북고남저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한라산의 정상에는 1,750∼1,950m의 고도대에서 급경사의 종상(鍾狀)을 보임으로써 완사면을 보이는 산체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라산의 주봉인 부악(釜岳)을 중심으로 하는 화산체를 따라 망애오름(1700m) · 영실오름(1639m) · 불래오름(1374m) · 법정이오름(760m) · 삼매봉(159m) · 베릿내오름(101m) 등의 크고 작은 측화산이 솟아 있다.
해안은 전반적으로 조면암질안산암 · 현무암 등으로 이루어져 해식작용에 의한 해식해의 발달이 현저하여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화산지역인 관계로 분출한 현무암이 암층을 이루며, 그위를 조면암이 덮고 있다.
하천은 이 지대가 간헐적인 융기와 해식, 그리고 안산암질 구조의 지반을 가져 경사급변점이 하구에 발달하여, 내창이라 부르는 건천이 대부분인 제주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일년 내내 물이 흐르는 상류천(常流川)이 될 뿐만 아니라 곳곳에 폭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요하천으로 연외천 · 천제천 · 정방천 · 효돈천 · 강정천 · 중문천 · 악근천 등이 있다.
기후는 한라산이 강한 겨울의 북풍을 막아주는 병풍 역할을 하며, 1월 평균기온은 5.9℃가 된다. 최난월의 평균기온은 26.5℃이며, 연평균기온은 15.7℃이다. 비록 바다를 끼고 있으나 대륙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이 고온이 되어 연교차가 크나 산북 제주시의 21.2℃보다, 그리고 서울의 28.8℃보다는 낮다. 여름이 되면서 태평양상의 아열대고기압에 의한 전선과 한라산이라는 지형 때문에 연강수량은 1,688㎜로 한국 최대의 강우지역을 이룬다.
구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으로는 천지연폭포 남쪽 바위 밑에서 후기구석기시대의 은거지가 발견됨으로써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나, 그들이 오늘날의 주민과 연계되는지는 의심스럽다. 신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인 고인돌 · 간석기 · 민무늬토기 · 조개무지 등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말이나 청동기 초기에 집단생활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개벽신화에 의하면 모흥혈에서 용출한 고(高) · 양(良) · 부(夫) 삼신인이 벽랑국의 삼공주를 취하여 살면서 오곡을 심고 송아지 · 망아지를 길러 땅을 개척했다고 한다. 또 신라 때 고을나(高乙那)의 후손인 고후 등 삼형제가 입조하자, 신라왕은 각각 성주 · 왕자 · 도내의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 부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서귀’라는 지명은 원나라로 가는 조공선박이 바람을 피하여 홍로천 깊숙이 정박했다가 서쪽으로 갔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탐라국의 일부로 삼한시대부터 중국대륙 및 한반도와의 교역이 행하여졌으며, 476년(문주왕 2)부터 방물도 바쳤으나 498년(동성왕 20)에 이르러 백제에 복속되었으며,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에 복속되었다.
925년(태조 8) 탐라는 처음으로 방물을 바쳤으며,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2년 뒤인 938년 탐라왕 고자견이 태자 말도를 파견, 입조함으로써 고려의 조공국이 되었다. 1105년(숙종 10)에 이르러 탐라군으로 개편되어 고려의 직접적인 관할 하에 들어갔다. 1153년(의종 7) 군이 현으로 강등되어 최척경(崔陟卿)이 탐라령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1271년(원종 12)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웅거하여 약 3년을 지냈으나 김방경(金方慶)이 이를 토평하였다. 그 뒤 원나라의 직속령이 되었으며 1276년(충렬왕 2) 원나라가 목마장을 개설하여 망할 때까지 관할하였다. 1294년 고려에 환원되었고 그뒤 1367년(공민왕 16)까지 여러 차례 귀속이 바뀌었다.
1300년(충렬왕 26) 탐라현 산하에 귀일 · 고내 · 애월 · 곽지 · 귀덕 · 명월 · 신촌 · 함덕 · 김녕 · 호촌 · 홍로 · 예래 · 산방 · 차귀 등 14개 현촌이 설치되었는데, 그중 서귀포시에 해당되는 지역은 예래와 홍로이다. 1362년(공민왕 11) 목호(牧胡)의 난으로 또 다시 탐라만호라는 관리의 관할에 있다가 1367년 고려의 요청으로 완전히 귀속되었다.
1402년(태종 2) 오랫동안 전래되어온 성주 · 왕자의 칭호가 폐지되고 실질적인 조선왕조의 행정력 속에 포함되었다. 1416년 제주도안무사 오식(吳湜)의 건의로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을 제주목으로 하고 산남을 동서로 양분하여 정의 · 대정 두 현을 실시하여 각각 목사와 현감을 두었다. 이때 정의현에 소속된 홍로와 대정현에 소속된 예래가 지금의 서귀포시 지역에 해당한다. 그리고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서귀진(西歸鎭)과 동해방호소(東海防護所)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방리제가 실시됨에 따라 정의현은 동 · 중 · 서 3면, 대정현은 동서 2면으로 개편되었다. 1864년(고종 1) 정의 · 대정 두 현이 군으로 승격되어 전라도관찰사 관할 하에 있다가 1880년 다시 현으로 환원되었다.
1897년 정의현이 좌 · 중 · 우 3면으로, 대정현이 좌 · 중 2개 면으로 개편되었으며, 1906년 목사제가 폐지되어 군수가 두어졌다. 1911년 정의현에 서중면이 증설됨에 따라 그 동쪽이 동중면이라 불렸으며, 1913년 대정현에도 우면이 증설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정의 · 대정 두 현이 제주군에 병합되었고, 이때 정의현 좌면이 정의면, 대정현 우면이 대정면으로 개칭하였다. 1915년 도제 실시로 서귀는 제주도 우면, 중문은 좌면이 되었고, 1935년 서귀면과 중문면으로 개칭되었다.
1946년 도제 실시로 남제주군 서귀면과 중문면이 되었다가 1956년 서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7월 서귀읍과 중문면이 통합되어 시로 승격, 서귀포시가 되었다. 2006년 7월 1일부터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게 됨에 따라 서귀포시는 남제주군을 통합하여 행정시로 개편되었다.
서홍동 천지연폭포 부근에 구석기유적지가 있어, 긁개 · 돌날 · 홈날석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또, 예래동 일대에는 고인돌이 몇 기 분포하고 있다. 성지로는 정방폭포 위쪽으로 축성연대 미상의 서귀진성(西歸鎭城, 1589년 이축된 바 있음)의 자취가 군데군데 보인다.
사찰로는 중문동 하원리에 고려 말에 창건된 법화사지(法華寺址)가 있는데, 법화사는 원나라의 순제(順帝)가 주원장(朱元璋)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피난처로 지은 궁전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법화사에 있었던 아미타삼존불은 명나라까지 그 명성이 알려졌다. 1961년에 재건된 현재의 법화사 주위의 법화사지(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1971년 지정)에는 지름이 65㎝나 되는 주춧돌과 70여 개의 축대가 남아 있어, 당초 거대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난대림 식생을 나타내는 보목동 삼도(森島)에는 제주도 삼도 파초일엽 자생지(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도순리 녹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1964년 지정), 서흥동에 천지연 담팔수 자생지(천연기념물, 1964년 지정), 색달동에 천제연 담팔수나무(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1971년 지정), 천제연 난대림(천연기념물, 1993년 지정), 서흥동에 서귀포시 먼나무(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1971년 지정) 등이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또, 서흥동에 제주도 무태장어 서식지(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 서귀포층 패류 화석산지(천연기념물, 1968년 지정) 등 여러 문화유산이 있다.
조선시대 서귀포시는 행정구획상 법환동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나누어져 동쪽은 정의현, 서쪽은 대정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최초의 교육기관인 향교도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서귀포시 교육문화권은 법환동 동쪽이 정의향교, 서쪽이 대정향교권에 속해 있었다.
대정향교는 1408년(태조 9)에 창건되었고 1652년 이건, 1772년에 중건, 정의향교는 1738년(영조 13)에 창건되고 1848년에 이건되었다. 이 향교에는 교수 1인, 훈도 1인을 두어 주로 사관(士官)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향교 외에 서원 · 학당 · 서당 등이 있었는데, 서귀포시에는 문헌상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는 서원이나 학당은 전하지 않으나 서당은 전해지고 있다. 1778년(정조 2) 현감 황최언(黃最彦)이 세운 정의서당(旌義書堂)과 현감 고한조(高漢祚)가 세운 대정서당(大靜書堂)을 비롯, 여러 마을에 조그마한 서당들이 산재해 있어 각각 유학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왔다.
신 교육기관으로는 1920년 초등교육기관인 서귀공립보통학교와 서귀포북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38년 신효심상소학교(新孝尋常小學校)가 설립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교육기관이 급격히 늘어났으며,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5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0개교, 특수학교 1개교와 제주국제대학교가 있다.
집단놀이인 걸궁이 대표적 민속놀이이다. 걸궁은 농악의 일종으로 정월에 집집마다 돌며 굿을 쳐주어 잡귀를 쫓고 행운이 오게 하는 마을의 놀이행사이다. 걸궁패는 사대부 · 꿩바치(사냥꾼) · 중 차림의 배역이 앞장서고 꽹과리 · 북 · 장구 · 징 등의 풍물꾼이 뒤를 잇고, 농부 · 어부 · 해녀 · 상인 · 관원 등 여러 계층 사람들의 가장들이 뒤따라 행렬을 짓는다.
이어서 풍물을 울리고 행진무극적(行進舞劇的) 놀이를 하며 거리를 돌고, 집집마다 돌며 굿을 쳐주면 집집마다 제상에 쌀과 돈을 올려놓아 행운을 빈다. 이렇게 하여 수일간 마을의 놀이판을 벌이고, 모아놓은 쌀과 돈은 마을의 공금으로 유용하게 사용한다.
남성들이 주관하여 유교식으로 행하는 포제(酺祭)와 여성들이 주관하여 심방을 빌어 행하는 당굿이 병존하고 있다.
포제는 마을의 포제단에서 포신지위(酺神之位)라는 지방을 써 붙이고 돼지 한마리와 갖가지 제물을 올려 정월 첫 정일(丁日)에 행하는 제이다. 제관은 3헌관과 집례 · 대축 등 12제관으로 구성되며, 홀기에 따라 향교의 석전제 지내듯 행제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농포제라 하여 7월 첫 정일에 같은 방식의 제를 지내는 곳도 있다. 농포제는 농사의 풍년을 비는 제이다.
당굿은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사이의 어느 날을 제일로 정하고 마을의 본향당에서 행하는 신과세제(新過歲祭)와 2월 14∼15일에 행하는 영등굿이 있다. 근래에는 점점 굿의 규모가 작아져 간단한 기원형식으로 바뀐 마을도 있다.
이 지방에 전래되는 설화는 인물설화 · 자연물설화 · 지명전설 등 다양하다. 그중 변인태(邊仁泰)에 관한 설화는 봉이형 인물설화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다. 서귀진의 한 관노였다는 변인태는 뛰어난 기지와 해학으로 욕심 많은 관원의 버릇을 고쳐주고 음란한 원님을 조롱하고 탐관오리가 파직당하도록 꾀를 쓰는 등 좋은 일을 하기도 했지만, 뛰어난 지모로 거짓말도 잘하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변인태가 제주목을 향해 오다가 수십 명의 일꾼들이 김을 매고 있는 부잣집의 밭을 지나가게 되었다. 변인태를 보고서 밭주인 아주머니는 호기심이 생겨 “거짓말이나 하나 하고 가라”고 농을 던졌다. 변인태는 바쁜 걸음으로 지나치며 “지금 서귀진에 왜선이 들어 전통을 가지고 가고 있으니 거짓말할 사이가 없다”고 하고 서둘러 갔다.
김을 매던 일꾼들은 왜선의 침범을 감시하는 ‘망한이’로 가기 위해 후닥닥 일어서서 흩어져 갔다. 물론, 왜선이 떴다는 것은 변인태의 거짓말이었고 밭주인은 하루일만 망쳐서 단단히 화가 나서 변인태를 불러다 호통을 쳤다. 변인태는 부인이 거짓말을 하라고 하기 때문에 그리하였을 뿐이라고 발뺌하니 주인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서홍동의 지장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된 유래담이 있다. 송나라에서는 고종달을 보내어 제주도의 지혈(地血)을 끊어 뛰어난 인물이 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산방산 남단 절노리코지를 절단하고 나서 지장샘을 없애 수맥을 단절하기 위해 서홍동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종달이 도착하기 직전에 샘가에서 쉬던 한 젊은 농부가 백발노인에게서 “샘물을 길어 쇠질메(소길마) 속에 감추고 개가 오면 쫓고 장수가 물을 찾으면 모른다고 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농부가 샘물을 가득 길어 샘물이 금새 말라버리고 나자 개가 쇠질메쪽으로 오므로 쫓아버렸다. 이윽고 고종달이 나타나 풍수지도를 보면서 샘 있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농부는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떼었으므로 고종달은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지도를 찢고 사라졌다. 얼마 뒤 백발노인이 다시 나타나 샘물을 샘터에 다시 쏟으라고 하여 그 말을 그대로 따랐더니 다시 예전의 샘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지장샘이 고수된 덕에 동리 사람들은 물 걱정 없이 살 수가 있었다.
이밖에도 요녀로 변신한 여우를 잡은 「이좌수설화」, 선묘를 이장하여 날개 돋친 아들을 죽게 한 「아기장수설화」, 자식을 낳기 위해 절에서 기도하던 여인이 중에게 겁간 당하고 자결하여 만들어졌다는 「열녀바위전설」 등이 전한다.
이 지방에는 각종 노동요와 유희요 등이 전승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농업노동요인 「맷돌노래」가 있다. 이 민요는 두 여인 또는 세 여인이 교창형식으로 부른다. 어느 구절에서는 다른 부분에 비해 한 사람이 부르는 가사 내용이 매우 길다는 점과, 부르는 이가 겪었던 일들이 직접 노래 속에 들어 있어 현실성이 강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가건 오마 일러랑 두엉/가난 올 줄 모르는구나/어멍 신 디 가는 이 시민/말을 기밸 리여마는/가난 곡 선한 집이/뱅이 드난 더 선한다/가난도 선한도 마랑/지장샘이 물만이 살라/가당근에 낭게나 걸리라/오당근에 돌에나 걸리라/정망 곡 설롸나지라/뉘게 빌은 덕이 건/젱게 벌은 덕으로 알라”와 같다.
이 민요가 불려지기 시작한 서귀포시 중문동 일대는 각박한 토질 때문에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삼재배가 농업의 주종을 이루어왔으며, 마을 사람들은 삼으로 옷감을 만들어 타지방으로 행상을 다니며 곡물과 물물교환을 하면서 살았다. 이처럼 그들의 삶이 이 민요의 가사내용에 묘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가사내용은 제주도 내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밖에도 유희요로 「오돌또기」 · 「이야홍」, 농업노동요로 「밭 밟는 노래」 · 「타작노래」, 어업노동요로 「해녀노래」 · 「뱃노래」 등이 전한다.
농경지 총면적은 67.6km2인데 제주도에서는 유일하게 상류천(常流川)이 발달하였다. 전체 농경지에서 밭은 47.6%, 과수원은 47.2%, 논은 5.2%이다.
밭농사로서 식량작물은 생산량을 기준으로 서류 · 두류 · 미곡 · 맥류 순으로 재배되고 있으나 생산량이 많지 않은 편이다. 또한 특용작물로서 녹차를 제외하고 유채 · 참깨가 재배되나 역시 사양작물이 되고 있다.
과실류로는 감귤 · 파인애플 · 키위 등이 재배되나 전체 과원면적의 98.8%가 감귤재배지로 그 외의 과실생산은 역시 사양작물이 되고 있다. 서귀포하면 역시 감귤의 고장으로 감귤재배가 시작된 것은 70여 년이 되나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로 과원의 면적은 안정 상태로 더 증가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한라봉, 골드키위, 용과 등 새로운 열대과일의 생산이 시도되고 있다.
축산업은 대규모의 기업목장이 있어서 소 · 돼지 · 말 · 닭 등이 사육되나 도내의 다른 시 · 군에 비하면 낙후한 상태다. 수산업은 서귀포항을 중심으로 연근해어업이 발달하였으며, 삼치 · 고등어 · 옥돔 · 도미 · 갈치 · 멸치 등이 주로 잡힌다. 또한, 양식업도 성하여 전복 · 소라 · 해조류 등이 생산되고 있다.
광공업은 제주도의 다른 시 · 군보다도 더욱 미발달하여 식품공업이 겨우 형성되어 있을 정도이다. 70년대까지 고구마를 원료로 하는 전분공장이 많이 있었지만 감귤농업이 발달하면서 고구마 재배는 사양작물이 되어 지금 현재는 장원산업의 녹차 생산 외에는 이렇다 할 공장이 없다.
상업활동은 1970년을 전후하여 제주시와 연결되는 두 개의 횡단도로와 90년대 전후로 동부산업도로와 서부산업도로가 개통되면서 그 기능이 제주시에 빼앗기면서 침체 일로에 있다. 최근에는 이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할인판매장이 입지하면서 다시 한 번 상권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중문국제관광단지를 중심으로 해서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등 관광서비스산업 시설이 연이어 건설되면서 제주도 최대의 관광산업도시로의 발돋움하고 있다.
교통은 5 · 16도로와 제2횡단도로 등 한라산을 횡단하는 2개의 도로와 서부관광도로 등이 개통되어 제주시와의 접근성이 높아졌다.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지닌 천혜의 관광지로 한라산을 주봉으로 한 곳곳의 기암절경과 폭포 · 섬 · 천연기념물 · 희귀식물 · 특용작물 · 해수욕장 · 관광농원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근 해저지형과 동 · 식물 등의 경관이 다른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분포되어 있어 시 전체가 관광지로서 보호 또는 개발될 대상에 속한다. 특히 제주도내에서도 기후가 가장 온화하고 바람이 적으므로 관광개발상에 남다른 이점을 지니는 한편, 감귤 · 한라봉 · 키위 · 녹차 등의 열대작물 재배지로서도 유명하다.
천연기념물인 난대림과 담팔수가 우거져 있고 무태장어가 살고 있으며 상 · 중 · 하의 3단으로 이루어진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 담팔수가 자생하는 선경의 천지연폭포,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바다로 폭포수가 떨어지는 폭포로서, 그리고 진시황의 사자인 서시(徐市)가 돌아간 지점으로 서시과차(徐市過此)의 음각으로 유명한 정방폭포, 외돌괴와 주상절리가 발달한 해안절벽의 남주 해금강, 천연기념물인 파초일엽으로 유명한 섶섬과 문섬 · 범섬 · 새섬 등이 있다.
그밖에 물맞이로 유명한 돈내코, 오백나한의 영실기암과 사시사철 맑은 물과 은어로 유명한 강정천, 용흥동의 엉또폭포가 있다. 그리고 흑 · 백 · 적 · 회색의 4색 모래 사장인 중문해수욕장이 있다. 곳곳에 남국의 정취를 담뿍 풍기는 관광농원이 분포한다.
시의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약 14㎞, 천제연폭포 서쪽 일대는 제주도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개발되어 온 국제 수준의 중문관광단지가 있다. 이 지역은 사방 16㎞ 이내에 영실기암, 1,100고지 등의 산악경관이 자리하고, 동쪽으로 천제연 폭포와 해안의 기암경관 그리고 서쪽으로 산방굴사 · 안덕계곡 등이 분포한다.
또한, 중문해수욕장과 상설사냥터인 대유수렵장이 이웃하고 있다. 단지 내에는 수개의 특급관광호텔을 비롯하여 동양최대의 관광식물원인 여미지식물원과, 로얄마린파크 등이 있어 제주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관광단지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제주국제자유도시 7대 선도 프로젝트의 하나인 서귀포 미항 건설과 예래동 휴양단지 건설 등이 추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