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훈(安壎: 1881~1958)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자는 자정(子精), 호는 분암(憤庵) 또는 야계(倻溪)이다, 아버지는 안홍섭(安洪燮)이고 어머니는 함안 조씨 조성순(趙性順)의 딸이다. 어려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인정을 받아 그에게서 자(字)를 받았고, 20세 때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901년에 고향에 완계정사(浣溪精舍)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했다.
이석용(李錫庸)이 의병 활동 재개를 위해 각 지역에 조직한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의 남원 지역 단원으로 활동했을 당시, 1911년에 목화 20근을 군자금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일제의 창씨개명 등에 반대하며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고, 1941년에는 이석용의 추모비를 세우려다 검거되기도 했다. 2003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분암문집(憤庵文集)』은 26권[원집 23권, 속집 3권] 9책의 연활자본(鉛活字本)이며,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전북대학교 도서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도서관 등에 등일 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간사지와 간사년 등은 모두 미상이다.
서발문 등이 없고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어 편찬 및 간행 경위를 확인할 수 없다.
권1~2는 시(詩)로, 권1에 143제(題) 229수(首), 권2에 157제 308수로 도합 300제 537수의 한시가 실려 있다. 대체로 일상에서의 감회를 읊은 것들이 많고, 시사(詩社) 활동을 하며 지은 작품들도 눈에 띈다. 한편 우국(憂國)의 충정을 노래하거나 독립운동과 관련된 시편들도 종종 발견되는데, 민영환(閔泳渙)의 자결 소식을 듣고 지은 「유객자경성래……(有客自京城來)」, 함께 의병 활동을 했던 이석용을 위해 지은 「정재이군경항……(靜齋李君敬恒)」 등의 작품이 있다. 또한 해방 소식을 듣고 그 감격을 「을유칠월구일문복국보주필지희(乙酉七月九日聞復國報走筆志喜)」로 남기기도 했다.
권313은 서(書)로, 스승인 기우만, 곽종석을 비롯하여 하겸진(河謙鎭), 신기선(申箕善) 등 당대의 명사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 그리고 제자들과 예학 등에 대해 문답한 내용 등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권14는 잡저(雜著)로 기(記), 설(說) 등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이중 「완계정사학규(浣溪精舍學規)」는 그가 설립한 완계정사의 운영 규정으로, 그 성격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권15는 서(序)로 몇 편의 수서(壽序)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적에 붙인 서문들이다. 권16은 기(記)로 다양한 건축물에 부친 작품들이 수록되었다. 권17은 발(跋), 잠(箴), 명(銘), 찬(贊), 혼계(昏啓), 상량문(上梁文), 축문(祝文), 제문(祭文), 애사(哀辭) 등 다양한 문체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특히 잠은 음주를 경계하는 내용의 작품들이며, 찬의 「영상자찬(影像自贊)」은 61세 때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내용이다. 권18은 비(碑)와 묘지(墓誌)로, 효열비(孝烈碑), 공덕비(功德碑) 등 다양한 성격의 비문이 수록되었다. 권1920은 묘표(墓表), 권21~22는 묘갈명(墓碣銘), 권23은 행장(行狀), 유사(遺事), 전(傳)으로, 자신의 가족과 친인척 및 교유하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전기적 기록을 실었다.
속집(續集) 1책은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권1은 부(賦)에 풍백(風伯)을 꾸짖는 「책풍백부(責風伯賦)」, 쥐를 힐난하는 「힐서부(詰鼠賦)」, 시에 본집에서 누락된 시 69제 77수가 수록되었고, 이외에도 서(書), 잡저, 서(序), 기 등 다양한 문체의 글이 실렸다. 잡저의 「과문설(科文說)」은 과거가 폐지된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과시(科試)에 대한 개항기 문인의 인식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권2는 비(碑), 묘표, 묘갈명, 행장, 전 등의 전기적 기록이 수록되었다. 권3은 「제자기문(諸子記聞)」으로, 제자들이 기록한 그의 말을 경설(經說), 예설(禮說), 잡록(雜錄)으로 구분하여 실으면서 매 조목마다 말미에 기록자의 성명을 표기했다.
이 책은 개항기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생존한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안훈의 문집으로, 그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당대의 저명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주고 받은 시와 서신 등은 이 시기 사상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역사적 격동기에 전통적 지식인이 어떻게 대응하였는가를 잘 보여 주는 표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