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고부재자관, 희천군수, 제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자 고부재자관(告訃齎咨官)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0년 이후에는 희천군수 · 제주목사 등 외직을 역임했다. 이는 심낙수의 언론이 과격하여 심낙수를 아끼는 친구 서유린(徐有隣)의 뜻이었다고 한다. 1795년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고향인 파산(坡山)에서 은거하다가 죽었다.
홍양호(洪良浩) · 심이지(沈頤之) · 홍낙순(洪樂舜) · 이규경(李圭景)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심환지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김구주와 함께 홍봉한(洪鳳漢) 공격을 의리로 삼자 심환지와 결별하였다. 그 뒤 남 · 북당의 분열을 화의 근본이라 하여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심환지 · 김종수 · 유언호(兪彦鎬)를 맹렬히 공격함으로써 이른바 시파(時派) 언론의 선봉이 되었다.
이 때문에 신유사옥 때는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6년 후에 신원되기도 하였다. 이는 심낙수의 처가 홍봉한의 친우인 이사질(李思質)의 딸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심낙수의 할머니의 할아버지인 최규서(崔奎瑞) 집안의 영향을 받아 탕평책을 적극 지지했기 때문인 것 같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집을 보고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하며, 김양행(金亮行) · 김원행(金元行)의 정치적 입장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권상하(權尙夏)의 증손인 권진응(權震應)과 혼인 관계를 맺기도 해서 호락논쟁(湖洛論爭: 권상하의 문인들이 인간과 동물의 성품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해 벌인 논쟁)을 세도의 화근이라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서 『은파산고』를 지었다. 시파의 입장에서 벽파(僻派)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전기를 남겼으며 그 본말의 기록을 자신의 입장에서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은파산고(恩坡散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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