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결사(念佛結社)는 염불로 왕생을 구하려는 뜻을 가진 도반들이 일정 기간 동안 함께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 여산의 혜원이 백련사를 결성하고 염불결사를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발징이 미타만일회를 결성하여 염불결사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진억이 오대산에서 수정결사를 하였으며, 지눌은 수선사에서 정혜쌍수 염불수행을 하는 수선결사를 결성하였다. 또한 천태종의 요세는 백련사에서 법화삼매참회와 정토왕생을 구하는 백련결사를 하였다. 이러한 결사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만일염불회로 계승되었다.
결사(結社)는 불교도들이 특정한 목적을 세우고 장기간 함께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이다. 염불결사(念佛結社)란 뜻을 같이 하는 도반(道伴)들이 일정 기간 염불 신앙을 닦기 위해 맺은 수행 단체이다.
염불결사의 기원은 중국의 여산 혜원(廬山慧遠, 334~416)이 결성한 백련결사(白蓮結社)로부터 시작된다. 『고승전』에 의하면 여산에 동림사(東林寺)를 세운 혜원은 자신이 58세가 되던 386년부터 83세의 나이로 입적할 때까지 30여 년 동안 산문(山門)을 나오지 않고 정토왕생(淨土往生)을 위해 염불결사를 하였다고 한다. 혜원은 『반주삼매경』에 의한 염불삼매로 견불왕생(見佛往生)하고자 하였다. 402년 결사에서는 유유민(劉遺民) 등 123명이 혜원의 뜻에 동참하여 염불결사를 결성하였고 철저한 수행, 자급자족, 청정계율 등을 실천하여 후대 염불결사의 모범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염불결사는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발징(發徵)이 개설하였다. 발징은 팔진(八珍)과 동일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강원도 고성군 원각사(圓覺寺)에서 신자 1,000여 명을 모아 결사를 조직하고, 정수(精修)와 노력(努力) 두 패로 나누어 1만 일을 기약하며 수행하였다. 이 때문에 이 결사를 미타만일회(彌陀萬日會)라고도 한다. 미타만일회의 결사 기간에 대해서는 748∼776년이었다는 설과 758∼786년이었다는 설이 있다. ‘정수’는 염불에만 전념하는 승려를 뜻하며, ‘노력’은 수행에 전념하는 승려들을 도우며 정진하던 재가신자 즉 향도(香徒)를 의미한다. 이때의 결사에는 31명의 승려와 1,000여 명의 향도들이 참가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서방정토에 왕생하였다고 한다.
애장왕 때 강주(剛州) 주변에 살던 아간(阿干) 귀진(貴珍) 등이 월성군 안강의 미타사에서 두 번째로 만일염불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때의 결사 기간이 808∼815년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결사를 주도했던 귀진의 집에는 욱면(郁面)이라는 노비가 있었다. 욱면은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염불했지만 법당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주인 귀진은 욱면에게 매일 저녁 곡식 2섬을 찧게 하며 욱면의 수행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욱면은 부지런히 염불수행하여 주인보다도 먼저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고려 인종 대(1127년)에는 진억(津億)이 지리산 오대사(五臺社)에서 수정결사(水精結社)를 하였다. 그의 결사는 『점찰선악업보경』에 근거하여 선악의 과보를 점찰하여 악한 보(報)를 참회하고 서방왕생을 구하는 염불결사였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염불결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염불결사로 후대의 염불결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눌은 1182(명종 12년) 개경의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 정혜결사(定慧結社)의 필요성을 동학 10여 인에게 밝히고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였다. 그 후 지눌은 1189년 거조사(居祖寺)에 들어가 정혜결사를 시작하여 1198년까지 11년 동안 제1차 정혜결사를 진행하였다. 1191년 지눌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하며 염불수행(念佛修行)과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기치로 선종뿐 아니라 교종도 결사에 참여하도록 권하였고, 유교나 도교에도 결사를 개방하였다. 그 후 지눌은 1196년(신종 원년) 상무주암에 은거한 후부터 1210년(희종 6) 53세로 입적할 때까지 13여 년 동안 제2차 정혜결사를 진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많은 동참자가 생기자 지눌은 비좁은 거조사를 떠나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정혜사를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1205(희종 원년) 수선사 중창이 끝나자 희종은 '조계산 수선사(曹溪山修禪社)'라는 편액을 내렸다. 이로 인해 지눌의 결사는 수선결사(修禪結社)로 불리게 되었다. 지눌 사후 제2세 혜심(慧諶, 1178∼1234년)이 결사를 주도하였고, 혼원(混元)과 천영(天英) 대에 이르러 계속 성행하다가, 최씨 정권이 몰락한 1258년 이후 서서히 퇴조하였다.
수선결사와 더불어 고려 때 대표적인 염불결사는 원묘 요세(圓妙了世, 1163~1245)의 백련결사이다. 요세는 지눌에게 수선의 권유를 받고 정혜사에 참여하였다가 "만일 천태의 묘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영명연수(永明延壽)의 120병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고 하며 지눌에게서 나와 『관무량수경묘종초』 6권을 강의하며 참회를 닦았다. 1211년 요세는 만덕산 터에 가람을 개창하고, 1232년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였다. 요세는 보현도량을 최초로 열어 법화삼매와 구생정토(求生淨土)를 닦으며 결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1236년 「백련결사문」이 지어져 백련사의 염불결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결사는 2세인 천인(天因)과 4세인 천책(天頙), 무기(無寄) 등이 계승하였다.
염불결사는 근세에 이르러 만일염불회로 계승되었다. 1851년(철종 2) 유총(侑聰)이 결사하였고, 1881년부터 1908년까지 관준(寬俊)이 결사하였으며, 1908년에는 의중(宜重)이 결사하였고, 1927년에는 덕성(德性)이 결사하는 등 결사의 전통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