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때 궁내부 산하에 설치되어 왕실 소속의 토목 공사나 건물의 건축, 수리 업무를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공조(工曹) 산하의 선공감(繕工監)이 관영 건축을 담당하였는데, 그 업무를 계승한 관서가 영선사다. 1894년(고종 31) 7월 22일에 제정된 궁내부 관제에는 전각사(殿閣司)가 설치되어 궁궐의 각 전각을 관리하고 수리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기존의 선공감을 여기에 소속시켰다.
1895년(고종 32) 4월 2일, 궁내부 관제를 개정하면서 전각사는 폐지되고 제용원(濟用院) 산하에 주전사(主殿司)와 영선사가 설치되었는데, 주전사는 궁궐 건물의 관리 업무를, 영선사는 왕실에 관계되는 토목 공사, 건축, 수리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관원으로 장(長) 1인은 주임관(奏任官)으로, 주사 4인 이하는 판임관(判任官)으로 임명하였다.
같은 해 11월 10일, 다시 궁내부 관제가 개정되어 제용원이 폐지되면서 영선사는 궁내부 직속 관서로 독립하였다. 장 1인은 주임관으로, 주사 3인은 판임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을 결정하면서 새 황궁으로서 경운궁 건설 사업이 시작되고, 영선사의 업무도 점차 확대되었다. 특히 환구단 설치, 각 능(陵)과 석물(石物)을 개보수하는 등의 업무로 기사(技師), 기수(技手) 등 관원도 계속 증원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제권이 강화되면서 경운궁 내에 여러 전각들이 신축되었고, 1904년 4월 대화재 이후 경운궁 중건사업도 있어서 영선사의 업무가 크게 확대되었다. 하지만 1904년 이후 일제가 고문정치를 실시하고 황제권을 해체하기 위해 제실제도정리국(帝室制度整理局)을 설치하여 궁내부를 대폭 축소하는 과정에서 영선사도 점차 축소되었다.
1907년 7월 19일에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자 8월 27일에 순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11월 13일에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영선사는 창덕궁 수리 업무가 끝난 뒤 12월에 폐지되었다. 그 업무는 궁내부 내장원 토목과로 편입되었다. 이후 내장원 토목과에는 일본인 기술자들이 대거 진출하여 궁내부 건축을 주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