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映遂)는 1884년(고종 21) 6월 29일 경상도 함양에서 태어났다. 김해(金海) 김(金)씨이고 부친은 김상용(金相用), 모친은 충주(忠州) 석(石)씨이다. 어릴 때 이름은 창진(昌辰)이고, 출가 후 법명을 영수(映遂), 호를 포광(包光), 또는 두류산인(頭流山人)이라고 했다.
1895년 함양 영원사(靈源寺)에서 출가하고 환명(煥明)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영호남의 이름난 강백들을 찾아가 이력 과정의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 과목을 순차적으로 배웠다. 1906년에 건당식을 하고 영원사의 강주가 되었으며, 1913년에 남원 실상사(實相寺) 주지, 1916년에는 보은 법주사(法住寺)의 주지를 맡았다. 1918년에 상경하여 불교중앙학림에서 『능엄경』과 『사분율』, 그리고 불교사를 강의했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불교 청년단체를 대표하여 독립운동 자금 조달 등을 위해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를 방문하고 귀국했고, 다음 해에 함양 법화사(法華寺)의 주지가 되었다. 1928년부터 불교전수학교에서 가르쳤는데. 1930년에 중앙불교전문학교로 바뀌었고 그는 1931년 5월부터 1932년 10월까지 이 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1940년에는 중앙불전이 혜화전문으로 재편되면서 그만두고 순천 선암사(仙巖寺)의 주지를 지냈다. 해방 후 1946년부터는 동국대학의 교수가 되어 불교사 등을 강의했고, 1948년 12월부터 1950년 4월까지 동국대의 학장(총장)을 맡았다. 1952년에는 전북대, 1953년에 원광대의 교수가 되어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1967년 1월 10일 84세로 입적했으며 고향 함양에 탑을 세워 봉안했다.
저술로는 『조선불교사고』(1939) 외에 『금산사지』, 『실상사지』, 『해인사지』와 같은 사지, 그의 논저와 국역 불전 등을 한데 묶어서 전집으로 나온 『한국불교사상논고』(1984) 등이 있다. 『조선불교사고』는 중앙불전의 강의 교재로 쓰기 위해 필사본으로 등사한 3편 35장의 한국 불교 통사이다. 논문으로는 「오교양종에 대하여」, 「조선불교의 종명과 전등 및 종지에 대하여」 등 한국 불교의 종파와 교단에 대한 선구적 업적이 다수 있다.
그는 고려시대를 오교구산(五敎九山)에서 오교양종(五敎兩宗)으로의 변화로 설명했고 조선 전기는 선교양종(禪敎兩宗) 체제로 정리했다. 이는 교종과 선종을 포괄한 불교 교단 전체의 공식 명칭이 시기별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검토한 것으로 이후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8년 전라북도문화상을 받고 1966년 동국대에서 학술공로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