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묵(吳成默)은 1886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자강(自强), 페트르이다. 6세 되던 해 부모와 함께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이주하였다. 길림도립중학을 졸업한 후 북간도에서 청년 단체를 조직하여 계몽운동을 하였다.
1913년 간민회(墾民會, 이후 대한국민회로 개편) 결성에 참여하였다. 1915년 중국 당국의 박해를 피하여 러시아 극동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키로 이주하였다. 건설노동장에 징집되어 벌목장 통역원으로 일하였다. 1918년 4월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李東輝) · 김립(金立) · 박애(朴愛) · 김알렉산드라 · 유스쩨빤 · 오하묵(吳夏默) · 이인섭(李仁燮) · 이경희 등과 함께 한인사회동맹을 결성하는 데 참가하였다. 1919년 초 러시아공산당원이 되었다.
1919년 3월 국내의 3 · 1운동에 자극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한인 노동자들의 시위가 볼셰비키 조직에 의해 시도되었다. 오성묵은 문안을 작성해 우수리스크에서 인쇄해 아내(신혜)에게 노동자 시위 현장에 운반하게 하였다. 1919년 4월 오성묵은 하바롭스크 청년회장으로서 전로청년결사단(全露靑年決死團)을 조직하였다. 1920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인사회당 의사원(議事員), 4월에는 재무부원(財務部員)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4월 일본 시베리아 출병군이 한인 사회를 무차별 습격한 '4월참변'이 발생하자 러시아 아무르로 피신하였다. 오성묵은 1920년 4월에 설립된 아무르주 한인공산당에 번역원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봄에 치타로 가 극동공화국의 인민혁명군 참모부의 통역관이 되었다.
시베리아 내전이 끝나자 1923년 3월부터 하바롭스크시당 교육 요원 및 연해주당고려부의 기관지 『 선봉(先鋒)』 편집장으로 일하였고, 연해주의 조선인과 중국인에게 정치교육 사업을 펼쳤다. 1924년 5월 고려공산당 창립준비대표회 준비위원회에서 조직부로 활동하였으며,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공산당 선전부장과 동양대학원 문과 역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1월 소련 공산당 극동국 및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한글 기관지 『선봉』의 사장이 되었다. 1934년에는 태평양사단 제2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바롭스크 극동국립출판사 조선부장으로 재임 중 스탈린의 대숙청에 휘말려 1937년 처형당하였다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