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복야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초기,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 등 3사(三司)에 두었던 정2품 관직의 하나.
제도/관직
설치 시기
1392년(태조 1)
폐지 시기
1400년(정종 2)
소속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내용 요약

우복야(右僕射)는 조선 초기,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 등 3사(三司)에 두었던 정2품 관직의 하나이다. 조선시대에는 3사에만 설치되었던 관직이다. 1392년(태조 1)부터 1400년(정종 2)까지 8년간만 설치가 확인된다. 우복야는 회계를 전담하는 핵심 관서인 3사의 당상관으로 부서의 업무뿐 아니라 당시 정치적 문제에도 의견을 개진하는 요직의 하나였다.

정의
조선 초기,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 등 3사(三司)에 두었던 정2품 관직의 하나.
설치 목적

고려시대부터 존재하던 관직이다. 본래 고려 3성의 하나였던 상서성(尙書省)의 직제였기 때문에 중앙의 핵심 주1으로 기능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회계를 전담하는 3사(三司)의 직제로 존재하였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때의 직제를 그대로 계승하여 설치되었다.

임무와 직능

1392년(태조 1)에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 등의 3사(三司)에 설치된 관직이다. 3사는 관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고 국가 경비를 계산하는 업무를 맡았다. 조선 건국 초기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 문하부(門下府) 다음으로 소개될 만큼 핵심적인 관서였다.

우복야는 정1품 영사(領事), 종1품 판사(判事)에 이어 정2품 좌복야와 함께 삼사의 당상관으로 기능하였다. 정2품의 관료였기 때문에 3사 내의 사안 이외에 국가 정무에도 참여하여 정치적 견해를 개진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

변천사항

우복야는 본래 고려시대에는 상서성의 정2품 관직이었다. 이후 상서성을 혁파하고 첨의부를 두었으며 우복야는 첨의부에 설치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상서성이 복구되면서 우복야도 부활하였다. 1362년(공민왕 11)에 성서성이 혁파되고 3사가 분리되면서 3사에 우복야가 설치되었다. 이전까지 3사에는 우복야 직제가 없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직후 고려의 제도를 이어 받아 관제를 정하였다.

우복야는 3사의 정2품 관원으로 설치된 것이 확인된다. 1400년(정종 2) 직제 개편 당시 좌우복야가 좌우사(左右使)로 개편되면서 복야는 폐지되었다. 한편, 1401년(태종 1) 관제 개편 당시 3사는 주2로 개칭되었고, 1405년(태종 5)에 사평부 역시 호조(戶曹)에 합병되면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속대전(續大典)』
『육전조례(六典條例)』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단행본

한충희, 『조선초기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논문

한충희, 「정치구조의 정비와 정치기구」(『한국사』 23, 국사편찬위원회, 1994)
주석
주1

중요한 직책이나 직위.    우리말샘

주2

조선 초기에, 재정(財政)을 맡아보던 관아. 태종 원년(1401)에 삼사(三司)를 고친 것으로, 태종 5년에 호조(戶曹)에 병합하였다.    우리말샘

집필자
나영훈(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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