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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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사건
1862년(철종 13) 9∼11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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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62년(철종 13) 9∼11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란.
내용

제주도 농어민의 기질과 이 섬 특유의 경제적 수탈 및 육지 민란의 영향 등이 합쳐져 일어났다.

제1차 봉기는 이 해 9월 12일에 시작되어 15일에 끝났다. 그 목적은 대정현 화전민의 과다한 화전세를 시정하는데 있었다. 주동자는 조만송(趙萬松)·장환(張煥) 등이었다.

12일에는 화전민이 감색(監色)의 처소로 몰려가 뇌물로 받아 둔 명주·포목·남초 등의 재물과 화전세 수세 문서를 불태우고 색리를 구타하였다. 13일에는 답험감관(踏驗監官) 진경로(秦京路)·강위진(姜謂鎭)의 집을 때려부수었다. 14일에는 성문이 굳게 닫혀 주춤하였다.

그러나 15일 아침에 성문이 열리자 색리 정승우(鄭承宇)와 영이방(營吏房) 김종주(金鍾周)의 집을 부수고 재물을 꺼내어 짓밟았다. 이 때 1,000여 명이나 되는 봉기 민중은 제주목사 임헌대(任憲大)의 모든 폐해를 제거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산하였다.

제2차 봉기는 강제검(姜悌儉)·현재득(玄才得) 등의 주동으로 10월 6일부터 며칠간 계속되었다. 제주 3읍의 민중 1만여 명은 패랭이를 쓰고 몽둥이를 들고 관리의 눈을 피해 성안으로 몰려들어가 부정 이서배(吏胥輩)의 죄를 들추어냈다.

동시에 평소에 증오의 대상이 되어 오던 부호의 집을 부수거나 불태우고, 혹은 그 재물을 빼앗기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하였다.

한편, 제주항과 서귀포에 정박 중이던 내륙 상인의 교역 선박을 습격해 그 재물을 빼앗고 불태웠다. 그러나 도민을 괴롭히던 대표적인 부정 이서 5인을 직접 타살하려던 목적은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목사가 그들을 법에 따라 처형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뒤 흩어져 돌아갔다.

제3차 봉기는 11월 15일부터 12월 9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 강제검·김흥채(金興彩)·박흥열(朴興悅)·조만송 등을 주동자로 한 군중의 수는 제2차 봉기 때의 2배도 넘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 군중은 15·16일에는 성밖에서 부호의 집을 부수거나 불태우면서, 목사의 설득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17일 오후에는 남쪽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아직까지 다섯 죄인을 처형하지 않았음을 성토하면서 관아를 점거하였다. 그러자 목사는 겁에 질려 화북포(禾北浦)로 피신했다가 이 달 25일에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봉기군은 12월 9일까지 모든 행정을 마음대로 처결하였다. 이 때 군중이 타살하려는 부정 이서 5인 중 김종주·김석룡(金錫龍)과 그 밖에 김성수(金性洙)·김석한(金錫翰)·이일성(李日成) 등을 타살하였다. 또한, 집을 부수거나 불태운 것이 141호, 재물의 손실이 수만 냥에 이르러 임술민란의 대표급에 속하는 농민운동이었다.

이 봉기는 안핵사 이건필(李建弼)에 의해 다음해 4월에 완전히 수습되었다. 이 때 처형 상황은 관리 측이 목사 임헌대의 함경도 귀양을 비롯한 17인, 민중 측이 강제검·김흥채의 효수를 비롯한 22인이었다.

참고문헌

『철종실록(哲宗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임술록(壬戌錄)』
「철종조의 제주민란에 대하여」(김진봉, 『사학연구』 21,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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