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고산동1호분은 고산동고분군에 포함되어 있으며 천장부가 완전히 유실되어 사라졌다. 봉토는 방대형으로 조사 당시 길이 20m, 높이 3.5m로써 대형급이었다. 널길〔羨道〕이 널방〔玄室〕남벽의 동쪽에 치우친 대표적인 사신도(四神圖) 위주의 외방무덤〔單室墓〕으로서, 주벽(主壁) 상부 이상은 파괴되어 없어졌다.
널방 크기는 동서 3.06m, 남북 3.3m로서 정방형에 가까우며, 벽면 높이는 1.5m 가량 된다. 벽화는 잘 바른 회벽 위에 사신도를 그렸지만, 청룡·백호·현무의 일부만 확인되었다. 사신 표현 양식은 고식(古式)에 속하는데, 청룡도와 백호도에는 각각 “□신광난□□□진력(□神光難□□□進力)”과 “백신원락길□(白神□□遠洛吉□)""호(虎)"〔‘신(神)’ 옆 괘선 바깥쪽에 ‘호(虎)’라는 글자가 써져 있음〕라는 묵서가 있다.
그밖에 남벽에는 수문장이 그려져 있고, 각 벽에는 건축의장과 불꽃무늬〔火炎文〕가 남아 있다. 이는 생활풍속도 계통 벽화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써, 고산동1호분이 사신도로 전환되던 과도기적 형식임을 말해준다.
널길에는 문지기 개〔門犬〕같은 괴수(怪獸)를 그렸고, 주벽에는 사격(斜格)의 바둑 문대(文帶)를 벽면 아랫부분 1/3정도에서 옆으로 그어 상하 2단으로 만들고 상부의 넓은 공간에는 사신, 하부에는 삼각불꽃무늬〔三角火炎文〕과 곡선구름무늬〔曲線雲文〕등을 가득 그려넣었다.
불꽃무늬는 중기의 것을 닮았고 둘레 가장자리의 C자문도 뚜렷하다. 사신은 비교적 세화(細畵)로서 강서대묘(江西大墓)의 그것을 연상시키나, 현무의 모습은 고졸하여 이 고분이 중기와 연결되는 가장 초기의 사신총임을 알 수 있다.
사신도의 치밀한 표현으로 보아 이 고분은 5세기 후반이나 늦어도 6세기 전반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