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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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도 / 십우도
심우도 / 십우도
회화
개념
소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 소 그림.
이칭
이칭
소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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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우도는 소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이다. 본격적인 우도는 불교의 십우도와 목우도, 문인화가들의 영모화이다. 조선 중기 소 그림을 잘 그린 화가는 김시·이경윤 등이다. 이 시기 소 그림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소 한 마리나 두세 마리가 들판에 놓여 있는 방우도 형식의 그림이 주류를 이룬다. 소가 목동과 함께 그려지는 목우도나 기우도는 조선 후기에 보다 활발히 그려졌다. 농사일을 하는 소, 소를 탄 인물 등 현실 속 한우의 모습이 이때 그려졌다. 근대 화가들도 소 그림을 다양하게 제작하였는데 특히 이중섭의 소 그림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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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소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 소 그림.
연원

는 인류의 생활에서 노동력과 식량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 등에서 보듯이 구석기시대부터 소 그림이 출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선사시대에 제작된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소 그림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소가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안악3호분에는 동쪽 곁방 남벽에 외양간의 소가 그려져 있고 회랑의 행렬도에 무덤 주인이 탄 수레를 끄는 소가 묘사되어 있다. 덕흥리 고분의 앞방 천장에도 소를 끄는 견우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소는 우리 민족의 생활에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 풍속을 표현한 그림이나 설화를 표현한 그림에서 일찍부터 소 그림이 등장하였다.

변천

본격적으로 소를 주제로 한 그림이 발전한 것은 불교에서 십우도(十牛圖)와 목우도(牧牛圖)가 그려지고, 조선 중기에 문인화가들이 영모화(翎毛畵)를 즐겨 그리면서부터이다. 불교의 소 그림은 중국 송(宋)의 보명(普明)이 그린 목우도와 곽암(廓庵)이 그린 십우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십우도는 수행과 깨달음의 과정을 소를 길들이는 과정으로 비유하여 10장으로 구성한 그림이다. 중국의 선종화가들은 10장으로 구성된 십우도와 목우도 뿐만 아니라 목우도와 산수화를 결합시킨 산수인물화 형식의 소 그림도 발전시켰다. 이들 소 그림들은 모두 우리나라에 함께 전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선종화가들의 소 그림의 영향으로 소와 목동을 그리는 도상이 일반 회화에서 인기있는 소재로 정착되어 오래도록 제작되었다.

일반 회화에서 소 그림은 조선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조선 중기에 소 그림을 잘 그린 화가는 김시 · 김식 부자, 이경윤 등이다. 조선 중기의 소 그림은 주로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렸으며 중국 소 그림의 영향을 받아 중국 남부 지방의 물소를 소재로 하였다. 특히 김시는 소를 그릴 때 몸통을 옅은 먹으로 그린 뒤, 눈, 코, 입, 꼬리, 발굽은 진한 먹으로 그리고, 코는 ‘×’자 모양으로, 등줄기는 점선 모양으로 그리는 등 자신만의 소 그림을 창안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김식의 소 그림을 거치면서 소 그림은 조선 중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그런데 조선 중기의 소 그림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고 소가 홀로 혹은 두세 마리가 자유롭게 들판에 풀어져 있는 방우도(放牛圖) 형식의 그림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그림 속의 소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조선 중기 문인들의 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소가 목동과 함께 그려지는 목우도(牧牛圖)나 기우도(騎牛圖)는 조선 후기에 와서 보다 활발히 그려졌다.

조선 후기에는 경직도풍속화가 유행하면서 소가 농사일을 하는 모습이나 소를 탄 인물의 모습 등 현실 속 한우(韓牛)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김두량의 「목동오수(牧童午睡)」와 같이 소와 목동을 소재로 한 사실적인 그림도 등장하였다. 실학자인 박제가는 목동이 소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목가적인 산수인물화풍의 「목우도」를 남겼다. 또 도석인물화가 유행하면서 노자가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린 「노자기우도(老子騎牛圖)」나 「청우출관도(靑牛出關圖)」가 즐겨 제작되었다. 이처럼 풍속화, 산수인물화에서 소를 소재로 한 그림은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실재하였던 소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삽화로 제작된 예도 전한다. 경상도 상주에서 호랑이가 농부를 해치려고 하자 소가 주인을 구하기 위해 호랑이와 싸우다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이야기를 그린 「의우도(義牛圖)」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기록되었고, 1703년 선산부사 조구명이 백성의 교화를 위해 펴낸 『의열도(義烈圖)』에서 다시 제작되어 널리 배포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소 그림이 보다 저변화된 것은 근대기 일본을 통해 서양화가 소개되고 새로운 회화 소재가 유입되면서부터이다. 소 그림은 1930년대부터 화가들 사이에서 향토적인 소재를 다룬 회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이는 일본 근대화단에서 낭만적인 자연풍경과 소를 주제로 한 그림이 유행했던 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특히 조선미술전람회와 같은 관전에서 한국적인 정취가 담긴 ‘조선 향토색’을 추구하는 그림들이 선호되면서 소를 모는 목동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다수 발표되었다. 동양화부에서는 장우성의 「귀목」, 이한구의 「귀로」, 서양화부에서는 심영수의 「게(憩)」, 이상돈의 「신록(新綠)」 등이 소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서 소를 통해 이상적인 농촌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근대 화가들이 한국적인 주제를 찾는 과정에서 소를 즐겨 그리게 된 후, 1950년대 이후 현대 화가들도 소를 한국의 향토성과 한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기면서 소 그림을 꾸준히 제작하였다. 조중현, 서세옥 등의 한국화가들은 소와 목동을 소재로 한 전원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김경, 이수억, 박영선, 황유엽, 이중섭과 같은 서양화가들도 입체주의, 표현주의, 앵포르멜 등 다양한 화풍으로 소 그림을 제작하였다. 특히 이중섭은 「소와 아이」, 「싸우는 소」, 「황소」와 같이 소를 소재로 한 작품을 여러 점 남겼는데, 그는 역동적이고 거친 필치로 그린 소를 통해 자신을 상징화하거나 분노와 증오 등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었다.

우리나라에서 소는 논을 갈고, 밭고랑을 만들고 수레를 끄는 농우(農牛)로서 농사일의 상징이었고, 1970년대까지 농사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재산의 하나였다. 따라서 향토적인 소 그림은 고향을 상징하는 표상으로서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미술100년』(국립현대미술관, 한길사, 2006)
「조선 후기 소 그림 연구」(김영헌, 고려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7)
「이중섭 소그림 속 표현의 의미」(허나영,『미술사학보』,2016)
「한국 근대 서양화의 소그림 연구」(윤지은,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조선중기 우도 연구」(김예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3)
「심우도 연구」(유윤빈,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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