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주(張觀柱)는 1898년 11월 7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하여 1984년 7월 20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1919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3 · 1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맞았다고 한다. 용천에서의 만세 시위는 3월 4일 양시, 3월 6일 남시, 4월 1일 양광면, 4월 6일 9읍 등지에서 4회에 걸쳐 전개되었으며, 4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장관주도 이때 검거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장관주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단원들과 연계하여 용천과 철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중국 봉천성(奉天省, 지금의 랴오닝성)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박장호 · 백삼규 · 전덕원 등이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들 중 군사부장 전덕원은 유인석의 문인으로 의병 투쟁에 참여한 바 있으며, 장관주와 같은 평안북도 용천 출신이었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말 복벽주의자(復辟主義者) 중심의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공화주의자(共和主義者) 중심의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양분되었는데, 박장호 등은 기원독립단에 참여하였다.
장관주는 국내에 잠입한 기원독립단 재무부장 전덕원 등을 자택에 숨겨주고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1920년 3월경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여순근으로부터 입수한 폭탄을 유성삼을 통하여 평양기홀병원의 여행렬에게 전달하였다. 유성삼은 평양의 기홀병원에서 독립의용단(獨立義勇團)을 조직하고 의열 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여순근의 아들이자 의용단 모험대장인 여행렬은 8월 평양부청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장관주는 이승훈과 조만식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고 하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위하여 국외로 망명하려다 안동현에서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1927년 2월 신의주경찰서에서는 일본의 관공서를 파괴하고 관리를 암살하려던 전덕원을 안동현에서 체포하였는데, 장관주도 이 무렵 체포된 것으로 짐작된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