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자는 광해군 때 편찬하여 찍어 낸 『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 221권 116책을 찍었던 활자이다. 『선조실록』은 1567년 7월부터 1608년 1월까지 선조 재위 40년 7개월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실록으로, 1609년(광해군 1년) 7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11월에 완성하였다.
선조실록자는 광해군 때 편찬하여 찍어 낸 『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 221권 116책을 찍었던 활자를 말한다. 『선조실록』은 1567년 7월부터 1608년 1월까지 선조 재위 40년 7개월 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실록으로, 1609년(광해군 1년) 7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11월에 완성한 책이다.
『선조실록』의 편찬과 간행의 과정에서 편찬에 참여한 실록청은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총재관(摠裁官)) 기자헌,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총재관(摠裁官)) 이항복 그리고 지사 17명으로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都廳堂上)에 이호민(李好閔), 유근(柳根), 이이첨(李爾瞻) 등으로 구성되었다. 초기에는 이항복(李恒福)이 총재관을 맡았으나 뒤에 기자헌이 대신하였다. 이 밖에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各房堂上)에 박건(朴健), 최유원(崔有源), 정광적(鄭光績) 등의 24인과 편수관(編修官)에 윤효전(尹孝全) 등의 48인, 기주관(記注官)에 김유(金紐) 등의 52인, 기사관(記事官)에 송일(宋馹) 등의 81인이 있었다. 이렇게 실록청은 모두 224명으로 구성되었다.
『선조실록』 전체의 분량은 총 221권 116책에 이르는 분량이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이후의 기록이 대부분이고 그 전의 기록은 25권 12책이다. 이는 임진왜란 이전에 작성된 사초들과 『춘추관일기(春秋館日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각사등록(各司謄錄)』 등 국가의 중요 문서와 기록들이 전쟁으로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이후 선조 재위 초기의 자료들을 수집하여 임진왜란 이전의 상황을 복원하고자 사대부들의 일기와 문집, 지방에 보관되어있던 조보(朝報)까지 수집하여 사료 복원에 힘을 기울였다.
훗날 1641년(인조 19년)에 기존의 『선조실록』이 잘못된 점이 많다고 하여 이식에게 명하여 『선조실록』을 개수하게 하였으나 미루어지다가 1657년(효종 8년)에 『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宣祖昭敬大王修正實錄)』과 『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宣祖大王實錄修正廳儀軌)』를 최종 완성함으로써 기존의 실록을 개수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선조실록』을 찍어내는 데 사용된 활자는 목활자로, 당시 임진왜란 이후의 복구로 힘든 상황에서도 목활자로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녹권(錄券)과 회맹록(會盟錄)을 찍었고 또 실록청에서 역대의 실록을 목활자로 찍으면서 공신도감의 장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당시 실록청에서는 난중에 소실된 역대 실록을 전주 사고본에 의거하여 새로 찍어내고자 하였다. 이에 교서관의 옛날 주자와 함께 쓸 수 있도록 각자(刻字)에 능한 훈련도감의 병사를 동원하여 목활자를 만들어 실록을 인출하였다. 이 목활자의 제작과 실록의 인출 기간이 선조 36년(1603)부터 39년(1606)까지 4년간이었다. 이렇게 새로 만든 활자로는 선조, 인조, 효종의 세 실록을 찍었다. 해당 목활자를 통칭하여 실록자라 부른다.
역대 실록에는 주자가 많이 섞여 있고 보충된 목활자의 서체가 비교적 양호하여 인쇄도 깨끗한 편이나 『선조실록』에는 대부분 새김이 거친 목활자로 사용되어 인쇄가 좋지않다. 선조실록자에는 갑인자체 목활자와 을해자체 목활자, 새로 제작된 목활자 등 여러 종류의 글씨체가 혼재되어 있어서 임진왜란 이전의 금속활자가 섞인 실록들의 인쇄면과 비교하면 새김도 거칠고 통일성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