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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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나라 1773년(고종 38)에, 『사고전서』의 귀중본을 뽑아 목활자로 인쇄한 책판.
이칭
이칭
무영전취진판(武英殿聚珍版)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취진판(聚珍板)은 중국 청나라 건륭 연간(乾隆年間, 1736~1795)에 중국의 관료 김간(金簡, ?~1794)이 칙명(勅命)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에서 140종의 선본(善本)을 선정하여 이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든 목활자판(木活字版)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무영전(武英殿)에서 목활자를 만들었다 하여 일명 ‘무영전취진판(武英殿聚珍版)’이라고 한다. 활자판(活字版)과 동일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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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중국 청나라 1773년(고종 38)에, 『사고전서』의 귀중본을 뽑아 목활자로 인쇄한 책판.
내용

취진판(聚珍版)은 청나라 황제 고종(高宗)이 붙인 이름이다. 조선에서는 이 취진판의 영향을 받아 목활자 생생자(生生字, 1792), 금속활자 정리자(整理字, 1795)가 제작되었다. 취진판에 관한 상세한 사항은 『무영전취진판정식(武英殿聚珍版程式)』에 잘 나타나 있다. 『무영전취진판정식』은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기 위하여 목활자(木活字)를 제작하고, 목활자의 제작 방식을 판화를 곁들여 설명한 책으로, 1776년에 중국 현지인 김간(金簡, ?~1794)이 편찬한 책이다.

김간(金簡)은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끌려간 우리나라 사람의 후손으로, 『국사대신열전(國史大臣列傳)』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1750년(淸 乾隆 15)에 내무부주사(內務府主事)로 출발하여 1773년에 사고관무(四庫館務)의 독촉검사(督促檢事)를 하는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의 부총재(副總裁)를 담당하였던 인물이다. 김간은 중국에서 목활자 인쇄의 연구 개발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인물이다. 이는 그의 저서 『무영전취진판정식』에 나타나는 인쇄 공정의 치밀한 개량(改良)에서 파악할 수 있다.

즉, 취진판은 활자의 제작 방법 측면에서 글자의 새김이 매우 정교하고 글자의 획이 균정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글자의 배열 또한 정연한 식자(識字)와 조판(組版, 판짜기)을 보여 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종래의 활자 인쇄 방법보다 진일보한 인쇄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은 취진판 용례(用例, 程式)의 영향을 받아 활자판의 일반적인 뜻으로 취진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에서는 종래 이러한 활판 인쇄의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명칭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청(淸) 고종이 ‘聚珍版(취진판)’이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 취진판의 인쇄에 사용된 활자는 ‘취진자(聚珍字)’라고 명칭하고, 이 활자로 인쇄된 책을 ‘취진본(聚珍本)’이라 한다. 혹은 ‘배자본(排字本)’ 또는 ‘배인본(排印本)’이라고도 한다. 이는 활자 인쇄를 시행할 때 개개의 활자를 원고의 문장대로 판 위에 배열하여 놓고, 이를 평평하고 판판하게 짠 다음에 인쇄하기 때문에 배인본이라 한 것이다.

한편, 우리의 기록인 ‘일성록(日省錄) 正祖5年(1781) 4월 18일’ 조(條)에 의하면, 1781년에 임제원(林濟遠, 1737~?)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문견별단(聞見別單)을 올렸다. 그 내용에 따르면 “무영전취진판(武英殿聚珍版)의 식례(式例)를 보니 사고전서를 인쇄하는 활자는, 인쇄하는 일이 방대하여 구리를 녹여 주조하는 법을 쓰지 않고, 대추나무로 수십만 자(字)를 새겨 공비(工費)를 절약할 수 있게 하니, 그 일을 시행하는 것이 지극히 치밀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취진판 변용(變用)의 3가지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목활자와 금속활자의 응용 사례: 정조(正祖, 在位 1777~1800)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문예 부흥 정책’에 치중하고 역대 선왕의 인쇄 정책을 계승하면서 종래의 활자를 개주(改鑄)하는 데 힘쓰는 과정에서 청나라 취진판의 인쇄 문화를 수용하여, 1792년에 『사고전서』에 들어 있는 취진판 강희자전(康熙字典)의 글자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목활자 생생자를 제작하였다. 생생자는 황양목(黃楊木)을 사용하여 만든 목활자로, 대자(大字) 15만 7,200자, 소자(小字) 16만 4,300자에 이른다. 이 활자는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목활자 중 가장 대규모이며, 내각(內閣)과 기영(箕營, 평양 소재) 관서에서 제조한 목활자로, 활자의 서체는 인서체(印書體)이다. 어제(御製)를 인쇄하기 위하여 제작된 활자이므로 그 새김과 조판의 모양이 매우 정교하다.

위와 같은 생생자 목활자는 그 개개 활자의 새김과 조판이 정연하여, 1795년에는 생생자를 자본으로 하여 금속활자를 주조하고 『정리의궤통편(整理儀軌通編)』을 인쇄하였으므로, 이 금속활자의 명칭은 앞의 책 서명에 의거하여 ‘정리자’라고 명명하였다. 정리자는 일종의 철활자(鐵活字)로, 활자의 재료는 ‘유철(鍮鐵, 놋쇠), 주철(鑄鐵), 유납(鍮鑞)’이다. 정리자의 주조량은, 초주(初鑄) 정리자의 경우 대자는 16만여 자, 소자는 14만여 자를 주성(鑄成)하였다. 재주(再鑄) 정리자의 경우 대자는 약 89,203자, 소자는 약 39,416자를 주성하였다.

정리자는 1857년 10월에 창경궁 내의 빈전도감(殯殿都監) 화재로 인하여 주자소(鑄字所)가 연소될 때 함께 소실되어, 이듬해인 1858년에 한구자(韓構字)와 함께 다시 주조되었다. 두 번째 개주(改鑄)이므로 ‘재주 정리자’라고 불린다. 재주 정리자는 초주에 비하여 정교도는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구한말(舊韓末)까지 ‘각종 교과서, 관보, 법령, 조약문’을 비롯한 일반 도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1911년 6월 1일에 궁내부(宮內府) 규장각(奎章閣)에서 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인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 목활자의 응용 사례: 19세기 초기의 뛰어난 문장가이면서 나중에 영의정까지 오른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관각(館閣: 교서관 제조(校書館提調) ·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을 주재할 무렵, 그의 인서(印書)에 대한 중국적인 취미로 사사로이 독특한 필서체(筆書體)의 목활자를 만들어, 1815년(순조 15)에 자신의 저서인 『금릉거사문집(金陵居士文集: 金陵集)』을 인쇄하였다. 이 문집의 책지(冊紙)는 중국 상품 죽지(竹紙)를 사용하였고 장정(裝幀) 또한 중국산 표지로 꾸몄으며 중국식 사침철장법[四針綴裝法, 四針眼訂法]으로 장책(粧冊)하였다. 이 목활자를 종래 ‘취진자(聚珍字)’로 일컬어 왔는데, 그 명칭은 동일한 활자로 나중에 인쇄한 자기의 저서 금릉집을 개편한 『귀은당집(歸恩堂集)』(1834)를 비롯하여 서명응(徐命膺)『보만재집(保晩齋集)』(1838) 등에 ‘취진판본(聚珍板本)’ 또는 ‘취진자파인(聚珍字擺印)’의 표시가 있다. 이에 따라 ‘취진판’이라는 명칭이 한국에서도 일반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금속활자의 응용 사례: 정조(正祖, 17521800)의 후궁이며 순조(純祖, 1790 1834)의 생모인 수빈(綏嬪)박씨의 오빠인 박종경(朴宗慶, 1765~1817)이 1816년에 청나라 ‘무영전 취진판(武英殿聚珍版) 이십일사(二十一史)’의 글자를 자본으로 하여 금속활자 20만 자를 주성하였다. 이 활자는 인서체 동활자(印書體 銅活字)이며, 박종경이 사사로이 활자를 주조하였으므로, 활자의 명칭은 박종경의 호(號)를 따서 ‘돈암인서체자(敦巖印書體字: 全史字)’라고 한다. 활자 실물 200여 자가 규장각에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취진판이 조선 후기의 인쇄 · 출판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1792년에 중국 취진판 강희자전의 글자를 자본으로 하여, 황양목으로 목활자를 제작하고, 어제를 찍으려고 『취진자보(聚珍字譜)』를 실험적으로 인쇄하였다. 그 이후 조선 후기의 인쇄술은, 생생자 목활자의 서체가 기존의 필서체에서 인서체로 변화되는 경향을 보였고, 목활자의 새김이 더욱 정교해지면서 조판 또한 더욱 정연해지는 등 조선 인쇄술의 변혁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생생자 목활자를 부자(父字, 바탕 글자)로 하여 금속활자 정리자(整理字, 1795)를 주성함으로써, 19세기 이후에 주조되는 여러 금속활자의 제작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日省錄(일성록)』 第665冊, 正祖16年壬子閏4月24日條
『板堂考(판당고)』 鑄字事實(주자사실)

단행본

김두종, 『한국고인쇄기술사』(탐구당, 1974)
손보기, 『한국의 고활자』(보진재, 1982)
윤병태, 『조선후기의 활자와 책』(범우사, 1992)
천혜봉, 『한국목활자본』(범우사, 1993)
천혜봉, 『한국서지학』(민음사, 2006)
남권희, 『한국 금속활자 발달사: 조선시대』(경북대학교 출판부, 2018)
집필자
김성수(청주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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