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나라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695년에서 704년 사이에 번역하였다.
『백천인다라니경(百千印陁羅尼經)』은 ‘경(景)’자의 함차(函次)가 표시된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의 일부이며 수정축을 가진 권자본의 형태로 전체 9장이다. 도침된 감지(紺紙) 바탕에 금니(金泥)로 친 테두리와 계선(界線)이 그어져 있고 한 행에 17자를 기준으로 16자에서 18자의 출입이 있다. 일본 교토[京都] 류우코쿠[龍谷]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10년(1284)에 국왕과 궁주(宮主)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발원으로 제작되었다. 금자대장경에는 『백천인다라니경』 이외에도 『구면연아귀다라니신주경(救面然餓鬼陁羅尼神呪經』, 『불설감로다라니주(佛說甘露陁羅尼呪)』, 『장엄왕다라니주경(莊嚴王陁羅尼呪經)』, 『향왕보살다라니주경(香王菩薩陁羅尼呪經)』 4개의 경전 및 다라니(陀羅尼)가 실려 있다. 서사자는 사경원(寫經院)의 사경승이 아닌 중군녹사겸수제군기주부(中軍綠事兼修製軍器注簿)라는 관직명을 가진 최정(崔楨)이다.
『백천인다라니경』은 전체 1권으로, 백천인 다라니와 그 공덕을 설한 내용이 담긴 경전이다. 『백천인다라니경』은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에 계실 때 백천인다라니를 대비구(大比丘) 대중과 대보살(大菩薩) 대중에게 설하시면서,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한 개의 탑을 세우고 백천인다라니를 베껴 써서 그 탑 안에 안치하면, 그 공덕이 백천 개의 탑을 세워 얻는 공덕과 다름이 없다고 설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용곡대학에 소장된 금자사경은 표지의 뒷면에 충렬왕의 두 번째 개명 이름인 ‘춘(賰)’자가 붉은 색 수결로 있고 이와 나란히 제국대장 공주의 기록이라는 의미의 ‘원성전(元成殿)’과, ‘봉인(封印)’의 뜻인 파스파문자 인장이 날인되어 있다.
용곡대학 소장의 금자사경은 충렬왕의 이름과 제국대장 공주의 기록이 있어 궁주(宮主)가 누구인지 분명해졌으며 국왕의 수결(手決)과 궁주의 인장이 처음 확인되는 사경이다. 또한 이 금자사경의 ‘경(景)’자 함차와 4종 경전의 문면(文面)은 방산석경(房山石經)과 『신집장경음의수함록(新集藏經音義隨函錄)』 제9책의 ‘경(景)’함에 포함되어 있어 고려시대 13세기의 사경원에서 제작된 대부분의 국왕 발원 사경이 재조대장경을 저본으로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거란장(契丹藏)과 문면이 일치한다는 특징이 있다.
고려의 13세기 국왕 발원 사경과 비교할 때 표지화 안쪽에 변상도가 바로 나오지 않고 발원자의 이름과 수결, 인장 등의 형태적 특징을 가진 국왕 발원 사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