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활자 인쇄 기술은 고려시대에 창안되었으나 정확한 창안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3세기 초에는 창안되어 책을 인쇄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문헌으로는, 1232년(고종 19)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천도한 고려 조정이 개경의 서적점(書籍店)에서 찍은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1239년에 번각하여 인쇄한 책이 전하고 있으며, 1234년 이전에 『상정예문(詳定禮文)』을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 1책이 소장되어 있다.
금속활자 제작 기술은 조선 전기 성종(成宗) 때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주물사를 이용하여 활자를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 방법은 미리 준비한 글자본을 황양목(黃楊木)에 새겨 부자(父字)를 만들고, 해포(海蒲)의 부드러운 진흙을 인판(암 주형틀)에다 평평하게 편 뒤 부자를 진흙에다 도장을 찍듯이 찍으면 오목하게 파여서 글자가 된다. 이에 쇳물을 흘러 들어갈 탕로를 만들고 꼭 같은 인판(수 주형틀)에 흙을 채워 합한 후 동(銅)을 녹여 한 편의 구멍으로 주입하면 쇳물이 오목하게 파인 곳으로 흘러 들어가 낱낱이 활자가 만들어진다. 이 방법이 주물사주조법이다.
또 다른 금속활자 제작 방법으로 밀랍을 이용해서 활자를 만드는 밀랍 주조법(蜜蠟鑄造法)이 있다. 문헌의 기록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 금속활자본 『직지』의 인면 특징을 분석하여 추정한 활자 제작 방식이다. 먼저 고체 상태의 밀랍으로 부자 활자를 만들고, 진흙으로 감싸서 굳힌 후 열을 가해 밀랍을 녹여내고 그 빈 공간에 쇳물을 주입하여 활자를 만드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 민간에서 사용하였던 도토주조법(陶土鑄造法)이 있는데, 이는 『후생록(厚生錄)』에 소개되어 있다. 도토주조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도토를 잘게 빻아서 나무판 위에 평평하게 편 다음 햇볕을 쬐여 반 정도 말린 뒤, 얇은 종이에 크고 작은 글자를 필요한 만큼 정성 들여 쓴다. 그런 후에 밀랍을 녹여 판 위에 뒤집어 붙이고 각수로 하여금 음각으로 새긴 다음, 녹인 쇳물을 붓고 식으면 활자를 개별로 잘라 내어 깎고 다듬어서 완성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인쇄와 관련한 장인은 교서관 소속으로 균자장(均字匠), 인출장(印出匠), 각자장(刻字匠), 목장(木匠), 제각장(除刻匠), 지장(紙匠), 책장(册匠), 조각장(彫刻匠), 야장(冶匠), 주장(鑄匠) 등을 두고 있다. 이 중에서 쇠를 다루는 장인은 ‘야장’과 ‘주장’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활자를 주조해 내는 사람을 주장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어, 주장의 역할은 활자를 만드는 일이고, 그 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일은 균자장과 인출장 등이 별도로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활자장’이라는 용어가 조선시대 금속활자 인쇄에서 특정 장인을 일컫는 명칭으로 사용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활자장은 활자의 주조에서 부터 조판과 인출 등의 일을 담당하는 주장, 균자장, 인출장 등 여러 분야의 장인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