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자강론은 1880년대 미국에 문호를 열고 국부 증진, 군사제도 정비 등의 정책 추진을 주장한 강위의 개국론이다. 1880년대 초 강위가 중국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의 영향을 받아 조선이 지향해야 할 부국강병 외교 노선으로 주장한 것이다. 중국을 제외한 외국과의 수교를 반대하는 위정척사파에 맞서 일본과의 수교에서 더 나아가 미국과 수교함으로써 자주적 개국을 완수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문호개방론이다.
강위(姜瑋)는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였지만 18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관직을 맡은 적이 없던 재야 지식인이었다. 원래 개화에도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1873년과 1874년 동지사를 따라 북경(北京)을 다녀온 뒤 서양과의 주1를 통해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화론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즉 강화도조약의 체결에도 관여하였다.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김옥균(金玉均)의 추천을 받아 서기로 동행하였는데, 이때 중국의 황준헌(黃遵憲)이 쓴 『조선책략』을 접하고 큰 영향을 받았다.
김홍집이 일본에서 돌아와 고종에게 『조선책략』을 바친 뒤 조선 정부는 미국과의 수교에 적극 나섰다. 이에 대미 수교를 둘러싸고 큰 논란이 일어났다. 척사위정파는 일본과의 수교에 이은 미국 등 서구와의 수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 쓴 글이 「박악라불가선연의(駁鄂羅不可先聯議)」와 「의고(擬誥)」이다. 앞의 글은 『조선책략』의 주장을 받아들여 러시아보다 미국과의 수교가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밝힌 것이고 뒤의 글은 임금의 고유문 형식을 빌어 대일 수교의 정당성마저도 부정하는 척사유생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강위는 러시아를 ‘호랑이 · 이리’로, 미국을 ‘남의 토지 · 인민을 탐하지 않고 공의(公議)를 펴는 나라’로 보았다. 여기까지는 『조선책략』의 러시아 · 미국 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책략』과 강위의 연미론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강위는 러시아와 먼저 연합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과 먼저 연합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곧 우선 순위의 차이일 뿐 러시아와 미국 모두를 수교 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나아가 강위는 “만국통상이 서로 돕는 이치가 있어서 이익이 있지 해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곧 국제법에 따라 미국을 위시해 다른 나라와 통상 관계를 맺는 것이 조선에게 이익이 되면 되었지 손해는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통상에서 직접 얻어지는 이익으로는 관세 수입으로 경비를 보탤 수 있다는 점, 무역의 수익으로 민산(民産)을 후하게 할 수 있는 점, 병농(兵農)의 제도가 더욱 갖춰질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이는 서양과의 통상을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바가 단순히 외침에 대비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부와 민부의 증진, 군사제도의 정비, 서양의 근대 기술 도입 등의 자강 정책 추진에도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연미는 곧 자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강위의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