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드마이어사절단은 1947년 7월 9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 한국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파견한 사절단이다. 중국에서는 국공내전에서 국민당 정부가 열세에 놓이고, 한반도에서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과 한국의 현지 진상조사를 위해 주중미군사령관이었던 웨드마이어를 대통령 특사로 삼아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미군정 당국자, 한국인 주요 인사들과 면담하였고 여러 사람으로부터 한국 정세를 담은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에 기초한 웨드마이어 보고서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되었다.
웨드마이어 사절단은 중국을 거쳐 1947년 8월 26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들의 일정은 남한 사정을 조사한다는 목적에 맞게, 우선 미군정 당국자들에게 한국의 정치 · 경제 · 사회 · 군사적 실태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남조선과도정부의 한국인 관리들에게 한국의 실정에 대한 보고를 듣는 것이 계획되었다. 다음으로 한국인 주요 인사들과 면담하고 부산으로 이동하여 지방 사정을 조사한 이후 개성 지역으로 이동하여 38선을 시찰하는 것을 끝으로 9월 3일 한국을 떠나는 것이었다. 웨드마이어는 우익, 중간파 정치지도자, 언론인, 사업가, 사회단체 대표 등 여러 부류의 한국인들과 면담했다. 하지만 웨드마이어와 면담한 인사들은 주로 우익이었다. 당시 좌익통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대표인 남조선노동당의 허헌과 조선인민당의 김원봉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웨드마이어는 한국인 지도급 인사들과 면담하여 한국의 실태를 조사하려고 했으나 그가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2~3일에 불과했다. 따라서 더 많은 한국인의 견해를 수렴하기 위해서 참고가 될 만한 사항을 서면으로 보내 줄 것을 한국인들에게 요청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여러 부류 한국인들이 웨드마이어에게 편지를 보냈다.
중국과 한국에서 조사를 모두 마친 웨드마이어는 하와이에서 중국과 한국에서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상황을 평가하고 향후 미국의 대처 방안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웨드마이어 보고서로 불리는 이 보고서는 1947년 9월 19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되었다. 미군정은 당시의 사회 불안이 점령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공산주의 침투에서 비롯되었다고 인식하였다. 미군정 당국은 우익이 주도하는 남한반공정부 수립을 타개책으로 생각했고, 웨드마이어에게 이를 건의하였다. 그러한 구상은 웨드마이어를 통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웨드마이어 보고서의 한국 부분은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해임한 직후 미국 의회가 그 배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1951년 5월 초 상원 군사외교위원회는 국무부의 승인을 받아 웨드마이어 보고서의 한국 편을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