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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고려 후기 제31대(재위: 1351~1374) 국왕이다. 1351년(충정왕 3) 10월에 즉위하여 1374년(공민왕 23) 9월에 시해되기까지 23년간 재위하였다. 공민왕의 재위 기간은 원나라 간섭이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가 건국되어 원명 교체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왜구의 잦은 침탈과 홍건적 침입으로 토지가 황폐되고 인명 손실이 커서 민생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공민왕은 이 같은 국내외 정세 속에서 여러 차례 개혁 정치를 추진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공민왕 (恭愍王)
공민왕은 고려 후기 제31대(재위: 1351~1374) 국왕이다. 1351년(충정왕 3) 10월에 즉위하여 1374년(공민왕 23) 9월에 시해되기까지 23년간 재위하였다. 공민왕의 재위 기간은 원나라 간섭이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가 건국되어 원명 교체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왜구의 잦은 침탈과 홍건적 침입으로 토지가 황폐되고 인명 손실이 커서 민생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공민왕은 이 같은 국내외 정세 속에서 여러 차례 개혁 정치를 추진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신돈은 고려 후기 공민왕 대 개혁정치를 추진한 승려이다. 신돈에 대해서는 『고려사』 등에서 요승(妖僧), 사승(邪僧), 용승(庸僧), 미승(微僧), 노호(老狐) 등으로 지칭하는 부정적 평가도 있으나, 개혁가로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전민변정 사업을 추진하여 토지와 예속민 문제를 해결하고 국학 중흥책을 실시한 점, 산관의 통제와 순자격제의 시행으로 관리 기강을 확립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신돈 (辛旽)
신돈은 고려 후기 공민왕 대 개혁정치를 추진한 승려이다. 신돈에 대해서는 『고려사』 등에서 요승(妖僧), 사승(邪僧), 용승(庸僧), 미승(微僧), 노호(老狐) 등으로 지칭하는 부정적 평가도 있으나, 개혁가로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전민변정 사업을 추진하여 토지와 예속민 문제를 해결하고 국학 중흥책을 실시한 점, 산관의 통제와 순자격제의 시행으로 관리 기강을 확립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단청은 건축 부재에 각종 문양을 채색하는 건축 미술을 말한다. 예부터 동북아 지역에서 발달한 목조건축은 내후성에 취약한 단점이 있다. 특히 주 건축재로 사용된 소나무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지만, 표면이 거칠고 건조 후 갈램이 크다. 이에 고대인들은 목조건축의 내후성 강화를 위해 부재 표면에 채료(彩料)를 칠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원시 단청의 출발이다. 건축 부재에 칠을 하는 작업에도 인간의 미의식이 발휘됐다. 시대 발달과 변천에 따라 권위·종교·기복·내세의 각종 상징 문양이 채색됐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날 단청이 파생된 것이다.
단청 (丹靑)
단청은 건축 부재에 각종 문양을 채색하는 건축 미술을 말한다. 예부터 동북아 지역에서 발달한 목조건축은 내후성에 취약한 단점이 있다. 특히 주 건축재로 사용된 소나무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지만, 표면이 거칠고 건조 후 갈램이 크다. 이에 고대인들은 목조건축의 내후성 강화를 위해 부재 표면에 채료(彩料)를 칠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원시 단청의 출발이다. 건축 부재에 칠을 하는 작업에도 인간의 미의식이 발휘됐다. 시대 발달과 변천에 따라 권위·종교·기복·내세의 각종 상징 문양이 채색됐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날 단청이 파생된 것이다.
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에 권세가의 대토지 불법 소유 및 농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이다. 고려 후기에 토지 침탈과 백성의 궁핍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1269년(원종 10)에 처음 설치된 기구였다. 이후 1288년(충렬왕 14), 1301년(충렬왕 27), 1352년(공민왕 1), 1366년(공민왕 15), 1381년(우왕 7), 1388년(우왕 14)에도 역시 토지와 백성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 반복해서 설치되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전민변정도감 (田民辨整都監)
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에 권세가의 대토지 불법 소유 및 농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이다. 고려 후기에 토지 침탈과 백성의 궁핍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1269년(원종 10)에 처음 설치된 기구였다. 이후 1288년(충렬왕 14), 1301년(충렬왕 27), 1352년(공민왕 1), 1366년(공민왕 15), 1381년(우왕 7), 1388년(우왕 14)에도 역시 토지와 백성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 반복해서 설치되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최충헌은 고려 후기 무신 집정 이의민을 제거하고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역임한 무신이다. 1149년(의종 3)에 태어나 1219년(고종 6)에 사망했다. 그는 피의 숙청을 통해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는 한편, ‘봉사십조(封事十條)’의 개혁책을 올리기도 하였다. 반대 세력의 저항을 평정하기 위해 도방(都房)·교정도감(敎定都監) 등 사적 권력 기구를 강화하였다. 이후 그의 권력은 4명의 국왕을 교체할 정도로 막강하였고, 4대 60여 년간 최 씨 무신 정권을 유지할 권력 기반을 닦았다.
최충헌 (崔忠獻)
최충헌은 고려 후기 무신 집정 이의민을 제거하고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역임한 무신이다. 1149년(의종 3)에 태어나 1219년(고종 6)에 사망했다. 그는 피의 숙청을 통해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는 한편, ‘봉사십조(封事十條)’의 개혁책을 올리기도 하였다. 반대 세력의 저항을 평정하기 위해 도방(都房)·교정도감(敎定都監) 등 사적 권력 기구를 강화하였다. 이후 그의 권력은 4명의 국왕을 교체할 정도로 막강하였고, 4대 60여 년간 최 씨 무신 정권을 유지할 권력 기반을 닦았다.
은병은 고려 전기 숙종 대에 표인(標印)하여 유통한 법정 은화이다. 숙종이 1097년(숙종 2)에 주전관을 설치하며 동전의 주조와 유통을 시작하였고, 1101년(숙종 6)에는 기존에 칭량 화폐의 역할을 하던 은(銀)을 제도권으로 편입하여 은병에 표인하여 유통하기 시작했다. 이후 원 간섭기 원의 지폐 보초(寶鈔)가 유입되며 은이 대량 유출되자 1331년(충혜왕 1)에는 은병의 유통을 금지하고 새로이 소은병을 제작하여 유통하는 제도 변화를 시도하였다. 고려시대 주조된 금속 화폐 중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유통되었으며 고액권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은병 (銀甁)
은병은 고려 전기 숙종 대에 표인(標印)하여 유통한 법정 은화이다. 숙종이 1097년(숙종 2)에 주전관을 설치하며 동전의 주조와 유통을 시작하였고, 1101년(숙종 6)에는 기존에 칭량 화폐의 역할을 하던 은(銀)을 제도권으로 편입하여 은병에 표인하여 유통하기 시작했다. 이후 원 간섭기 원의 지폐 보초(寶鈔)가 유입되며 은이 대량 유출되자 1331년(충혜왕 1)에는 은병의 유통을 금지하고 새로이 소은병을 제작하여 유통하는 제도 변화를 시도하였다. 고려시대 주조된 금속 화폐 중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유통되었으며 고액권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려시대 질병환자의 치료 및 병사자의 매장을 관장하던 임시관서.
구제도감 (救濟都監)
고려시대 질병환자의 치료 및 병사자의 매장을 관장하던 임시관서.
의천은 고려전기 국사, 승통, 국청사 제1대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이다. 1055년(문종 9)에 태어나 1101년(숙종 6)에 사망했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자원하여 11세에 출가했다. 송나라에 유학해 수도 변경의 여러 절에 머물면서 화엄과 천태 등의 교학에 대해 토론하며 견문을 넓혔다. 1086년(선종 3) 불교 전적 30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한 뒤,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불교전적 정비·편찬에 힘썼다. 1097년 국청사에서 천태종을 개립하여 교단의 통일과 국가 발전을 도모하고자 했다.
의천 (義天)
의천은 고려전기 국사, 승통, 국청사 제1대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이다. 1055년(문종 9)에 태어나 1101년(숙종 6)에 사망했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자원하여 11세에 출가했다. 송나라에 유학해 수도 변경의 여러 절에 머물면서 화엄과 천태 등의 교학에 대해 토론하며 견문을 넓혔다. 1086년(선종 3) 불교 전적 30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한 뒤,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불교전적 정비·편찬에 힘썼다. 1097년 국청사에서 천태종을 개립하여 교단의 통일과 국가 발전을 도모하고자 했다.
공녀는 고려 후기·조선 전기 원나라와 명나라의 요구로 국내에서 선발되어 원·명나라에 보내진 부녀와 처녀이다. 1274년(원종 15)에 몽골의 요구로 시작된 공녀 차출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80년간 50여 회 이상 이루어졌다. 원의 지속적인 공녀 요구로 고려에는 조혼(早婚)의 풍습이 생겼고, 원에서는 고려풍(高麗風)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공녀 요구는 명의 건국 후에도 잠시 이루어졌으나,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공녀 (貢女)
공녀는 고려 후기·조선 전기 원나라와 명나라의 요구로 국내에서 선발되어 원·명나라에 보내진 부녀와 처녀이다. 1274년(원종 15)에 몽골의 요구로 시작된 공녀 차출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80년간 50여 회 이상 이루어졌다. 원의 지속적인 공녀 요구로 고려에는 조혼(早婚)의 풍습이 생겼고, 원에서는 고려풍(高麗風)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공녀 요구는 명의 건국 후에도 잠시 이루어졌으나,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판이다.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가 소장하고 있다.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판을 새기게 되었다. 판각의 매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수록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237년 판각을 시작하여 1248년에 대장 목록을 마지막으로 새겼다. 대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62년에 국보, 1995년 세계문화유산,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판이다.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가 소장하고 있다.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판을 새기게 되었다. 판각의 매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수록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237년 판각을 시작하여 1248년에 대장 목록을 마지막으로 새겼다. 대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62년에 국보, 1995년 세계문화유산,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도제조(都提調)는 조선시대, 중앙에 두었던 정1품의 겸임 관직의 하나이다. 조선 전기에는 당상관이 없는 관서 가운데 중요한 곳에 설치하거나 임시 관서 가운데 대규모 사안을 처리하는 도감 같은 곳에 설치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나 훈련도감과 같은 새롭게 설치된 아문의 책임자로 도제조를 두었다. 일제시기에도 제도가 폐지되지 않고 임시 기구인 도감의 도제조는 계속 제수되었다.
도제조 (都提調)
도제조(都提調)는 조선시대, 중앙에 두었던 정1품의 겸임 관직의 하나이다. 조선 전기에는 당상관이 없는 관서 가운데 중요한 곳에 설치하거나 임시 관서 가운데 대규모 사안을 처리하는 도감 같은 곳에 설치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나 훈련도감과 같은 새롭게 설치된 아문의 책임자로 도제조를 두었다. 일제시기에도 제도가 폐지되지 않고 임시 기구인 도감의 도제조는 계속 제수되었다.
응방은 고려·조선시대에 매(鷹)의 사육과 사냥을 맡은 관서이다. 매사냥을 즐기는 몽골에서 들어온 제도로 1275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응방은 궁궐 안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는데, 특히 함경도 지방은 해동청(海東靑)의 산지로서 중시되었다. 응방의 횡포와 폐해로 인해 치폐를 거듭하다가 창왕 때에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5년에 설치되었다. 연산군 때에 갑사·정병 400인을 두었으며, 내금위 70인, 겸사복 10인을 보내어 매를 잡게 하는 등 민폐가 많았다. 응방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계속되다가 1715년에 완전히 혁파되었다.
응방 (鷹坊)
응방은 고려·조선시대에 매(鷹)의 사육과 사냥을 맡은 관서이다. 매사냥을 즐기는 몽골에서 들어온 제도로 1275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응방은 궁궐 안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는데, 특히 함경도 지방은 해동청(海東靑)의 산지로서 중시되었다. 응방의 횡포와 폐해로 인해 치폐를 거듭하다가 창왕 때에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5년에 설치되었다. 연산군 때에 갑사·정병 400인을 두었으며, 내금위 70인, 겸사복 10인을 보내어 매를 잡게 하는 등 민폐가 많았다. 응방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계속되다가 1715년에 완전히 혁파되었다.
조선 초기 노비소송을 처리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관서.
노비변정도감 (奴婢辨正都監)
조선 초기 노비소송을 처리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관서.
찰리변위도감은 고려 말기에 설치되었던 임시 관서이다. 호세가(豪勢家)들이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와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환원시키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1318년(충숙왕 5)부터 1321년(충숙왕 8)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설치되었으나, 충선왕과 충숙왕의 갈등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찰리변위도감 (拶理辨違都監)
찰리변위도감은 고려 말기에 설치되었던 임시 관서이다. 호세가(豪勢家)들이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와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환원시키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1318년(충숙왕 5)부터 1321년(충숙왕 8)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설치되었으나, 충선왕과 충숙왕의 갈등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1605년 공신도감에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선무원종공신에게 발급한 녹권.
선무원종공신녹권 (宣武原從功臣錄券)
1605년 공신도감에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선무원종공신에게 발급한 녹권.
충숙왕은 1313년~1330년과 1332년~1339년에 재위한 고려 제27대 왕이다. 1313년(충선왕 5) 충선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충선왕의 영향력 아래에서 정치 일선에 나서지 못하였다. 1320년(충숙왕 7) 충선왕이 실각한 후 정치 세력 개혁을 도모하였으나 충선왕 지지 세력이 일으킨 심왕옹립운동 및 입성론 등으로 인해 장기간 원에 억류되었다. 1330년(충숙왕 17) 충혜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1332년(충숙왕 복위1) 복위하였다.
충숙왕 (忠肅王)
충숙왕은 1313년~1330년과 1332년~1339년에 재위한 고려 제27대 왕이다. 1313년(충선왕 5) 충선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충선왕의 영향력 아래에서 정치 일선에 나서지 못하였다. 1320년(충숙왕 7) 충선왕이 실각한 후 정치 세력 개혁을 도모하였으나 충선왕 지지 세력이 일으킨 심왕옹립운동 및 입성론 등으로 인해 장기간 원에 억류되었다. 1330년(충숙왕 17) 충혜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1332년(충숙왕 복위1) 복위하였다.
준천사는 1760년(영조 36) 도성 안의 하수도인 개천(開川)을 준설하여 소통시키며, 백악(白岳)·인왕(仁旺)·목멱(木覓)·낙산(駱山)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1411년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여 백악·인왕 등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민가의 하수구에서 배출되는 물을 처리하는 인공 배수로를 만들었다. 300여 년간 개천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오물과 퇴적물로 수구가 막히고 악취도 심해져 1759년 준설에 착수하여 57일 만에 준설과 제방 석축의 보수 등 작업을 완료하였다. 준설을 완료한 후 상설기구로 설치되어 준천 관리와 4산 보호를 담당하였다.
준천사 (濬川司)
준천사는 1760년(영조 36) 도성 안의 하수도인 개천(開川)을 준설하여 소통시키며, 백악(白岳)·인왕(仁旺)·목멱(木覓)·낙산(駱山)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1411년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여 백악·인왕 등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민가의 하수구에서 배출되는 물을 처리하는 인공 배수로를 만들었다. 300여 년간 개천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오물과 퇴적물로 수구가 막히고 악취도 심해져 1759년 준설에 착수하여 57일 만에 준설과 제방 석축의 보수 등 작업을 완료하였다. 준설을 완료한 후 상설기구로 설치되어 준천 관리와 4산 보호를 담당하였다.
충목왕은 고려 제29대(1344~1348) 왕이다. 1337년(충숙왕 복위 6)생으로, 1344년(충혜왕 5) 충혜왕이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기간 중 폐정 개혁이 진행되어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기도 했으나, 정치도감의 활동 중 기황후의 일족인 기삼만이 옥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 1348년(충목왕 4)에 사망하였다.
충목왕 (忠穆王)
충목왕은 고려 제29대(1344~1348) 왕이다. 1337년(충숙왕 복위 6)생으로, 1344년(충혜왕 5) 충혜왕이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기간 중 폐정 개혁이 진행되어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기도 했으나, 정치도감의 활동 중 기황후의 일족인 기삼만이 옥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 1348년(충목왕 4)에 사망하였다.
노비추쇄도감은 조선시대 공노비로서 도망자와 은루자(隱漏者) 또는 불법으로 양인이 된 자를 색출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서이다. 공노비가 도망가거나 천적(賤籍)에 등재되는 것을 기피하여 공노비의 수효가 감소하자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경국대전』에는 3년마다 추쇄해 속안(續案)을, 20년마다 정안(正案)을 작성하도록 했다. 그러나 소요되는 기간이 오래 걸려서 실제로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왜란과 호란 이후에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1655년에 노비를 추쇄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801년 공노비를 혁파할 때까지 전국적인 추쇄를 위해 설치된 적은 없었다.
노비추쇄도감 (奴婢推刷都監)
노비추쇄도감은 조선시대 공노비로서 도망자와 은루자(隱漏者) 또는 불법으로 양인이 된 자를 색출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서이다. 공노비가 도망가거나 천적(賤籍)에 등재되는 것을 기피하여 공노비의 수효가 감소하자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경국대전』에는 3년마다 추쇄해 속안(續案)을, 20년마다 정안(正案)을 작성하도록 했다. 그러나 소요되는 기간이 오래 걸려서 실제로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왜란과 호란 이후에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1655년에 노비를 추쇄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801년 공노비를 혁파할 때까지 전국적인 추쇄를 위해 설치된 적은 없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시대 대몽항쟁 당시 고려대장경 목판을 조각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사찰터.
강화 선원사지 (江華 禪源寺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시대 대몽항쟁 당시 고려대장경 목판을 조각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사찰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