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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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은 1170년부터 1270년 사이에 무신 세력에 의해 주도된 고려 왕조의 정권이다. 무신 세력은 삼별초 등 사병집단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정방·교정별감 등의 기구를 설치하여 전횡을 일삼고 독재정치를 행하였다. 무신정권기에 불법적 토지 강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농민과 천민 등 하부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민란 발생과 더불어 신분질서의 동요가 일어났다. 무신정권 집권 후반부 40년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팔만대장경 제조 등으로 강렬한 민족주체의식이 발휘되었고 이는 후대의 배원정책으로 이어졌다.
무신정권 (武臣政權)
무신정권은 1170년부터 1270년 사이에 무신 세력에 의해 주도된 고려 왕조의 정권이다. 무신 세력은 삼별초 등 사병집단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정방·교정별감 등의 기구를 설치하여 전횡을 일삼고 독재정치를 행하였다. 무신정권기에 불법적 토지 강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농민과 천민 등 하부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민란 발생과 더불어 신분질서의 동요가 일어났다. 무신정권 집권 후반부 40년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팔만대장경 제조 등으로 강렬한 민족주체의식이 발휘되었고 이는 후대의 배원정책으로 이어졌다.
고려는 918년 개성 출신 왕건이 건국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합한 뒤 1392년 멸망 때까지 34명의 왕씨 출신 국왕이 474년 동안 통치한 왕조이다. 고려 초에 광종의 과거제 시행, 성종의 체제 정비를 거쳐 문종 때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이자겸과 묘청 난, 무신정변, 하층민의 봉기, 대몽항쟁 등으로 기존 질서가 크게 변동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원 간섭기, 성리학 수용, 위화도 회군과 사전 개혁 등의 진통을 겪은 끝에 조선이 건국되었다.
고려 (高麗)
고려는 918년 개성 출신 왕건이 건국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합한 뒤 1392년 멸망 때까지 34명의 왕씨 출신 국왕이 474년 동안 통치한 왕조이다. 고려 초에 광종의 과거제 시행, 성종의 체제 정비를 거쳐 문종 때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이자겸과 묘청 난, 무신정변, 하층민의 봉기, 대몽항쟁 등으로 기존 질서가 크게 변동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원 간섭기, 성리학 수용, 위화도 회군과 사전 개혁 등의 진통을 겪은 끝에 조선이 건국되었다.
삼별초는 고려시대 경찰 및 전투의 임무를 수행한 부대의 명칭이다. 무신집권기 최씨 정권의 사병으로 존재하던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말한다. 최우 집권기에 치안을 목적으로 경찰 업무를 하는 야별초를 조직했고 그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 온 자들로 편성된 신의군과 함께 삼별초라 하였다. 대몽항쟁에서 군사적 활약상이 두드러졌으나 대몽강화가 이루어지자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적 정부를 세우고 진도를 본거지로 삼아 3년 동안 싸우다가,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당했다.
삼별초 (三別抄)
삼별초는 고려시대 경찰 및 전투의 임무를 수행한 부대의 명칭이다. 무신집권기 최씨 정권의 사병으로 존재하던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말한다. 최우 집권기에 치안을 목적으로 경찰 업무를 하는 야별초를 조직했고 그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 온 자들로 편성된 신의군과 함께 삼별초라 하였다. 대몽항쟁에서 군사적 활약상이 두드러졌으나 대몽강화가 이루어지자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적 정부를 세우고 진도를 본거지로 삼아 3년 동안 싸우다가,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당했다.
정방은 1225년(고종 12) 6월,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한 인사담당 기관이다. 정당·정사당·죽당이라고도 한다. 최충헌 때부터 자신의 집에서 문무백관의 인사행정을 마음대로 해 오던 것을 최우가 공식 인사기구로 정착시킨 것이 정방이다. 무신정권은 행정실무와 문서작성에 능한 관리가 필요했고 여기에 벼슬길 진출을 갈망하던 사인층의 요구가 서로 부응하면서 설치되었다. 정방은 관리의 임명과 해임, 승진과 좌천 등 모든 권한을 장악하여 인사행정을 다루었다. 무신정권 이후에도 국가기관으로 변해 폐지와 재설립을 반복하다가 1388년(우왕 14)에 폐지되었다.
정방 (政房)
정방은 1225년(고종 12) 6월,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한 인사담당 기관이다. 정당·정사당·죽당이라고도 한다. 최충헌 때부터 자신의 집에서 문무백관의 인사행정을 마음대로 해 오던 것을 최우가 공식 인사기구로 정착시킨 것이 정방이다. 무신정권은 행정실무와 문서작성에 능한 관리가 필요했고 여기에 벼슬길 진출을 갈망하던 사인층의 요구가 서로 부응하면서 설치되었다. 정방은 관리의 임명과 해임, 승진과 좌천 등 모든 권한을 장악하여 인사행정을 다루었다. 무신정권 이후에도 국가기관으로 변해 폐지와 재설립을 반복하다가 1388년(우왕 14)에 폐지되었다.
만적의 난은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사노비 만적(萬積) 등이 신분 해방을 위해 일으킨 노비 저항이다. '노비'는 남자 종 '노(奴)'와 여자 종 '비(婢)'를 합하여 부른 말이다. 개경은 정치와 경제·문화 등의 중심지였다. 그곳의 노비들은 다른 지방의 노비들보다 사회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무신 정변 이후 정치적 격변 속에서 만적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국가 권력을 잡겠다는 이상을 가졌다. 하지만 같은 노비 출신인 순정(順貞)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만적의 난 (萬積의 亂)
만적의 난은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사노비 만적(萬積) 등이 신분 해방을 위해 일으킨 노비 저항이다. '노비'는 남자 종 '노(奴)'와 여자 종 '비(婢)'를 합하여 부른 말이다. 개경은 정치와 경제·문화 등의 중심지였다. 그곳의 노비들은 다른 지방의 노비들보다 사회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무신 정변 이후 정치적 격변 속에서 만적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국가 권력을 잡겠다는 이상을 가졌다. 하지만 같은 노비 출신인 순정(順貞)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무반은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지배계층인 양반 가운데 무관 반열이다. 전문 군사직은 삼국시대에도 있었지만, 관직제도상 문무반 중 하나라는 의미를 갖는 무반제도는 관료제가 정착되기 시작한 고려초에 도입돼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고려와 조선의 관료체계는 문반 중심으로 운영되어 무반은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았다. 고려 때는 노골적인 천대가 무신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고려 때는 무예가 출중하거나 공로를 세운 군인·향리·일품군의 장교 등에서 선발하거나 문·무 양반의 자제가 문음으로 출사했고, 조선 때는 무과를 설치해 무과급제자로 충당했다.
무반 (武班)
무반은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지배계층인 양반 가운데 무관 반열이다. 전문 군사직은 삼국시대에도 있었지만, 관직제도상 문무반 중 하나라는 의미를 갖는 무반제도는 관료제가 정착되기 시작한 고려초에 도입돼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고려와 조선의 관료체계는 문반 중심으로 운영되어 무반은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았다. 고려 때는 노골적인 천대가 무신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고려 때는 무예가 출중하거나 공로를 세운 군인·향리·일품군의 장교 등에서 선발하거나 문·무 양반의 자제가 문음으로 출사했고, 조선 때는 무과를 설치해 무과급제자로 충당했다.
이의방(李義方)은 1170년(의종 24) 정중부, 이고와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무신이다. 무신정변의 핵심 인물로서 대장군 정중부를 끌어들여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였다. 정변의 동료인 이고를 제거하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는 등 권력을 휘둘렀으나, 조위총의 난 때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김보당의 난을 진압하고 중방의 기능을 무신정권의 주요 통치 기구로 활성화하는 등 초기 무신정권의 성립 기반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이의방 (李義方)
이의방(李義方)은 1170년(의종 24) 정중부, 이고와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무신이다. 무신정변의 핵심 인물로서 대장군 정중부를 끌어들여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였다. 정변의 동료인 이고를 제거하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는 등 권력을 휘둘렀으나, 조위총의 난 때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김보당의 난을 진압하고 중방의 기능을 무신정권의 주요 통치 기구로 활성화하는 등 초기 무신정권의 성립 기반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이의민은 고려후기 상장군,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96년(명종 26)에 사망했다. 용력이 뛰어나 경군에 선발되었고 의종의 총애로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에 행동파 무신으로 가담했고, 1173년 김보당의 의종복위운동 때에는 의종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117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상장군에 올랐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경대승이 1183년에 사망하자 무신집정의 자리에 올라 12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1196년 최충헌 형제에게 피살되었다.
이의민 (李義旼)
이의민은 고려후기 상장군,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96년(명종 26)에 사망했다. 용력이 뛰어나 경군에 선발되었고 의종의 총애로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에 행동파 무신으로 가담했고, 1173년 김보당의 의종복위운동 때에는 의종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117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상장군에 올랐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경대승이 1183년에 사망하자 무신집정의 자리에 올라 12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1196년 최충헌 형제에게 피살되었다.
정중부는 고려 후기 무신 정변을 일으킨 주동 인물이며 무신정권 초기의 정국을 주도했던 무신이다. 1170년(의종 24) 대장군으로서 견룡 행수 산원인 이고, 이의방과 함께 무신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옹립하여 새로운 왕으로 세웠으며 다수의 문신을 살해하였다. 무신정권을 반대하는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이고, 이의방을 차례로 제거함으로써 권력을 집중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179년(명종 9) 경대승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정중부 (鄭仲夫)
정중부는 고려 후기 무신 정변을 일으킨 주동 인물이며 무신정권 초기의 정국을 주도했던 무신이다. 1170년(의종 24) 대장군으로서 견룡 행수 산원인 이고, 이의방과 함께 무신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옹립하여 새로운 왕으로 세웠으며 다수의 문신을 살해하였다. 무신정권을 반대하는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이고, 이의방을 차례로 제거함으로써 권력을 집중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179년(명종 9) 경대승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보현원사건은 1170년(의종 24) 무신 정중부(鄭仲夫) 등이 보현원(普賢院)에서 문신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보현원은 개경 동남쪽에 있던 사찰이고, 의종이 자주 행차하여 연회를 즐긴 장소였다. 의종은 정사를 멀리하고 문신들과 더불어 연회를 즐겼던 반면, 이를 호위하던 무신들은 상대적으로 차별받았다. 승선 임종식과 기거주 한뢰 등은 의종의 총애를 믿고 무신을 멸시하여 그들의 분노가 점점 쌓였다. 같은 해 8월 의종과 문신들이 보현원으로 행차하자, 정중부 등이 정변을 일으켜 왕의 측근 문신들과 환관을 대부분 살육하였다.
보현원사건 (普賢院事件)
보현원사건은 1170년(의종 24) 무신 정중부(鄭仲夫) 등이 보현원(普賢院)에서 문신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보현원은 개경 동남쪽에 있던 사찰이고, 의종이 자주 행차하여 연회를 즐긴 장소였다. 의종은 정사를 멀리하고 문신들과 더불어 연회를 즐겼던 반면, 이를 호위하던 무신들은 상대적으로 차별받았다. 승선 임종식과 기거주 한뢰 등은 의종의 총애를 믿고 무신을 멸시하여 그들의 분노가 점점 쌓였다. 같은 해 8월 의종과 문신들이 보현원으로 행차하자, 정중부 등이 정변을 일으켜 왕의 측근 문신들과 환관을 대부분 살육하였다.
고려 후기에, 교위, 사심관, 장군 등을 역임한 무신.
경대승 (慶大升)
고려 후기에, 교위, 사심관, 장군 등을 역임한 무신.
이인좌는 조선 후기 1728년(영조 4)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의 일부 세력이 연합해서 일으킨 반란의 주동자이다. 이 사건은 신임옥사로, 정국 주도권을 가졌던 소론 세력이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집권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이탄을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사건이다.
이인좌 (李麟佐)
이인좌는 조선 후기 1728년(영조 4)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의 일부 세력이 연합해서 일으킨 반란의 주동자이다. 이 사건은 신임옥사로, 정국 주도권을 가졌던 소론 세력이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집권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이탄을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사건이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 등이 문신귀족정치에 반발해 일으킨 난.
정중부의 난 (鄭仲夫의 亂)
1170년(의종 24) 정중부 등이 문신귀족정치에 반발해 일으킨 난.
조위총의 난은 1174년(명종 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武臣政權)에 반발해 일으킨 저항이다. 이 저항은 1173년(명종 3) 동계(東界) 김보당(金甫當)의 저항 이후 무신정권에 대한 위기 의식과 지방 사회의 폐단이 증폭되면서 촉발되었다. 저항 세력은 국도 개경(開京) 근처까지 위협할 정도로 거세게 저항했지만, 1176년(명종 6) 조위총이 제거됨으로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일반 민이 중심이 되어 저항을 이어갔다.
조위총의 난 (趙位寵의 亂)
조위총의 난은 1174년(명종 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武臣政權)에 반발해 일으킨 저항이다. 이 저항은 1173년(명종 3) 동계(東界) 김보당(金甫當)의 저항 이후 무신정권에 대한 위기 의식과 지방 사회의 폐단이 증폭되면서 촉발되었다. 저항 세력은 국도 개경(開京) 근처까지 위협할 정도로 거세게 저항했지만, 1176년(명종 6) 조위총이 제거됨으로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일반 민이 중심이 되어 저항을 이어갔다.
교정도감은 고려 후기의 무신 집권기 최고의 권력 기관이다. '교정소(敎定所)'라고도 하며, 최씨 정권기 국가의 비위와 규찰, 세정 업무 및 인사 행정 등 국정을 총괄하였다. 교정도감은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였지만 이후 권신들의 중추적 구실을 하는 정청(政廳)이 되어 강력한 기능을 발휘했다. 교정도감의 장관인 교정별감은 원칙적으로 직위가 장군인 사람만 임명될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 왕명에 의해 임명되지만 실제는 최고 무신 집권자가 자동적으로 승계했다. 1270년(원종 11)에 무신정권의 붕괴와 함께 소멸됐다.
교정도감 (敎定都監)
교정도감은 고려 후기의 무신 집권기 최고의 권력 기관이다. '교정소(敎定所)'라고도 하며, 최씨 정권기 국가의 비위와 규찰, 세정 업무 및 인사 행정 등 국정을 총괄하였다. 교정도감은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였지만 이후 권신들의 중추적 구실을 하는 정청(政廳)이 되어 강력한 기능을 발휘했다. 교정도감의 장관인 교정별감은 원칙적으로 직위가 장군인 사람만 임명될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 왕명에 의해 임명되지만 실제는 최고 무신 집권자가 자동적으로 승계했다. 1270년(원종 11)에 무신정권의 붕괴와 함께 소멸됐다.
사병은 국가의 공적(公的)인 군제(軍制)에 포함되지 않고, 특정한 개인 또는 집단에 사적(私的)으로 예속되어 있는 무력집단이다. 족병(族兵)·가병(家兵)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가노(家奴)나 유민(流民)로 구성되었다. 9세기 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각지의 호족들이 유민들을 모아 조직하였다. 고려 정부는 중앙집권화정책을 추진하여 호족들의 사병을 해체하였는데, 무신란 이후 무신들이 다시 사병을 양성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 의흥삼군부를 설치하여 사병을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제2차 왕자의 난 이후에 이방원에 의해 혁파되었다.
사병 (私兵)
사병은 국가의 공적(公的)인 군제(軍制)에 포함되지 않고, 특정한 개인 또는 집단에 사적(私的)으로 예속되어 있는 무력집단이다. 족병(族兵)·가병(家兵)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가노(家奴)나 유민(流民)로 구성되었다. 9세기 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각지의 호족들이 유민들을 모아 조직하였다. 고려 정부는 중앙집권화정책을 추진하여 호족들의 사병을 해체하였는데, 무신란 이후 무신들이 다시 사병을 양성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 의흥삼군부를 설치하여 사병을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제2차 왕자의 난 이후에 이방원에 의해 혁파되었다.
봉사십조(封事十條)는 1196년(명종 26)에 무인 집정자 최충헌이 정변의 정당성 및 정책 방향을 담아 국왕에게 올린 시무책이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토지, 조세, 관직자, 향리 등과 관련하여 10개 항의 폐정 개혁안을 제시한 것으로, 정변의 정당화 및 향후 정책 방향을 밝힌 것이라는 점에서 무신 정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봉사십조 (封事十條)
봉사십조(封事十條)는 1196년(명종 26)에 무인 집정자 최충헌이 정변의 정당성 및 정책 방향을 담아 국왕에게 올린 시무책이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토지, 조세, 관직자, 향리 등과 관련하여 10개 항의 폐정 개혁안을 제시한 것으로, 정변의 정당화 및 향후 정책 방향을 밝힌 것이라는 점에서 무신 정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김준은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戊午政變)을 주동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이어 시중(侍中)까지 오른 무신이다. 무오정변은 김준이 유경·박송비 등과 함께 최씨 무신정권의 4대 집정자 최의를 제거하여 왕정복고를 이룬 정변을 가리킨다. 이후 김준은 자기 휘하의 위사공신들과 연대하여 유경 등을 실각시키면서 ‘김준 정권’을 탄생시키고, 1265년(원종 3) 시중에 오르면서 해양후(海陽侯)에도 책봉되었다. 그는 정권을 독차지하면서 국왕 원종 및 몽골과 갈등하다가 1268년(원종 9) 임연에게 참살되었다.
김준 (金俊)
김준은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戊午政變)을 주동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이어 시중(侍中)까지 오른 무신이다. 무오정변은 김준이 유경·박송비 등과 함께 최씨 무신정권의 4대 집정자 최의를 제거하여 왕정복고를 이룬 정변을 가리킨다. 이후 김준은 자기 휘하의 위사공신들과 연대하여 유경 등을 실각시키면서 ‘김준 정권’을 탄생시키고, 1265년(원종 3) 시중에 오르면서 해양후(海陽侯)에도 책봉되었다. 그는 정권을 독차지하면서 국왕 원종 및 몽골과 갈등하다가 1268년(원종 9) 임연에게 참살되었다.
고려후기 응양용호군중랑장, 대장군위위경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이고 (李高)
고려후기 응양용호군중랑장, 대장군위위경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김윤후는 고려 후기 대몽항쟁 때 처인성과 충주성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승려 출신 무신이다. 승려로서 처인성전투에 참여하여 몽골의 장군 살리타이를 죽이는 공을 세웠다. 이후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충주성 전투에도 참여하여 일반 민과 더불어 승리로 이끈 전공을 세웠다. 이런 공로로 종6품의 섭랑장, 정3품의 상장군⋅병마사⋅추밀원부사⋅예부상서로 승진하였고, 마침내 정2품의 수사공 우복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김윤후 (金允侯)
김윤후는 고려 후기 대몽항쟁 때 처인성과 충주성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승려 출신 무신이다. 승려로서 처인성전투에 참여하여 몽골의 장군 살리타이를 죽이는 공을 세웠다. 이후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충주성 전투에도 참여하여 일반 민과 더불어 승리로 이끈 전공을 세웠다. 이런 공로로 종6품의 섭랑장, 정3품의 상장군⋅병마사⋅추밀원부사⋅예부상서로 승진하였고, 마침내 정2품의 수사공 우복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