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삼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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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천도는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지를 강화도로 옮긴 사건이다. 이는 최우(崔瑀)에 의해 단행되었고, 1270년(원종 11)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할 때까지 고려의 국도가 되었다. 이의 배경에는 정치적 측면에서 최 씨 정권의 정권 보위 차원, 지방 사회의 저항과 같은 정권에 대한 비판을 돌파하기 위한 면, 그리고 외교적 측면에서 몽골의 과도한 공물이나 인질 요구 등에 대한 회피 혹은 지연 전략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동안 잠재되어 있었던 지방 사회의 저항을 새롭게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화천도 (江華遷都)
강화천도는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지를 강화도로 옮긴 사건이다. 이는 최우(崔瑀)에 의해 단행되었고, 1270년(원종 11)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할 때까지 고려의 국도가 되었다. 이의 배경에는 정치적 측면에서 최 씨 정권의 정권 보위 차원, 지방 사회의 저항과 같은 정권에 대한 비판을 돌파하기 위한 면, 그리고 외교적 측면에서 몽골의 과도한 공물이나 인질 요구 등에 대한 회피 혹은 지연 전략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동안 잠재되어 있었던 지방 사회의 저항을 새롭게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최우 (崔瑀)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배중손은 고려 무신정권기의 장군으로 삼별초의 항쟁을 주도한 무신이다. 1270년 고려 원종은 강화도에서 철수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였는데 삼별초는 개경 환도를 거부하며 독자적 정부를 수립하였다. 삼별초는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본거지를 진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태세를 굳혔다. 연합군이 여러 차례 진도를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271년 홍다구가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었고, 배중손도 이때 남도석성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잔여세력은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계속 항전하였다.
배중손 (裵仲孫)
배중손은 고려 무신정권기의 장군으로 삼별초의 항쟁을 주도한 무신이다. 1270년 고려 원종은 강화도에서 철수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였는데 삼별초는 개경 환도를 거부하며 독자적 정부를 수립하였다. 삼별초는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본거지를 진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태세를 굳혔다. 연합군이 여러 차례 진도를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271년 홍다구가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었고, 배중손도 이때 남도석성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잔여세력은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계속 항전하였다.
다루가치는 고려 후기에 몽골제국에서 정복지의 총독, 감독관으로 두었다가 지방장관으로도 사용된 직명이다. 고려에는 1232년(고종 19)에 처음 설치되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후인 1270년부터 1278년까지 개경에 상주하였다.
다루가치 (達魯花赤)
다루가치는 고려 후기에 몽골제국에서 정복지의 총독, 감독관으로 두었다가 지방장관으로도 사용된 직명이다. 고려에는 1232년(고종 19)에 처음 설치되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후인 1270년부터 1278년까지 개경에 상주하였다.
여원연합군은 삼별초 항쟁을 진압한 뒤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동원된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다. 여몽연합군이라고도 한다. 몽골과 강화를 체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도를 거점으로 대항하였다. 고려 조정은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원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삼별초를 진압하였다. 이후 고려는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원나라는 일본정벌을 위해 다시 여원연합군이 조직하여,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정벌을 시도하였다. 두 차례 정벌은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어 실패하였고, 1294년 일본정벌 계획은 중단되었다.
여원연합군 (麗元聯合軍)
여원연합군은 삼별초 항쟁을 진압한 뒤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동원된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다. 여몽연합군이라고도 한다. 몽골과 강화를 체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도를 거점으로 대항하였다. 고려 조정은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원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삼별초를 진압하였다. 이후 고려는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원나라는 일본정벌을 위해 다시 여원연합군이 조직하여,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정벌을 시도하였다. 두 차례 정벌은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어 실패하였고, 1294년 일본정벌 계획은 중단되었다.
김방경은 고려 후기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몽골군과 함께 일본 정벌을 지휘했던 무신이다. 1248년(고종 35) 몽골 침입 때 서북면 병마판관으로서 위도(葦島)에 입보하여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함으로써 이름이 드러났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몽골군과 함께 진도와 제주도를 모두 함락하여 난을 진정시켰다. 1274년(원종 15)과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에 참여하였다. 안에서는 중찬으로 내정을 총괄하였고, 전쟁에 나가서는 고려왕조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방경 (金方慶)
김방경은 고려 후기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몽골군과 함께 일본 정벌을 지휘했던 무신이다. 1248년(고종 35) 몽골 침입 때 서북면 병마판관으로서 위도(葦島)에 입보하여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함으로써 이름이 드러났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몽골군과 함께 진도와 제주도를 모두 함락하여 난을 진정시켰다. 1274년(원종 15)과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에 참여하였다. 안에서는 중찬으로 내정을 총괄하였고, 전쟁에 나가서는 고려왕조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야별초는 고려후기 최씨 정권의 최우 집권기에 조직된 군대로서 삼별초(三別抄)의 모체가 된 부대이다. 야별초는 처음에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지만, 집권 무신 세력의 권력 유지에 중요한 무력적 수단이 되었다. 이런 점은 야별초가 관군(官軍)이면서도 사병(私兵)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점차 확대되면서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재편되었다가, 신의군(神義軍)이 조직되면서 삼별초가 되었다. 삼별초는 대몽 전쟁의 핵심 부대였고, 권력 변동에 중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야별초 (夜別抄)
야별초는 고려후기 최씨 정권의 최우 집권기에 조직된 군대로서 삼별초(三別抄)의 모체가 된 부대이다. 야별초는 처음에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지만, 집권 무신 세력의 권력 유지에 중요한 무력적 수단이 되었다. 이런 점은 야별초가 관군(官軍)이면서도 사병(私兵)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점차 확대되면서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재편되었다가, 신의군(神義軍)이 조직되면서 삼별초가 되었다. 삼별초는 대몽 전쟁의 핵심 부대였고, 권력 변동에 중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271년 일본의 가마쿠라막부에서 삼별초의 진도(珍島) 정부가 보낸 외교문서를 12조목으로 정리한 문서. 외교문서.
고려첩장불심조조 (高麗牒狀不審條條)
1271년 일본의 가마쿠라막부에서 삼별초의 진도(珍島) 정부가 보낸 외교문서를 12조목으로 정리한 문서. 외교문서.
신의군은 고려시대 최씨무신정권기에 조직된 삼별초의 하나이다. 몽골과의 항쟁을 주장한 최항에 의해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해온 자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신의군의 편성으로 야별초의 좌별초·우별초와 더불어 삼별초를 이루었다. 몽고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고 민족의식이 강한 군대였기 때문에 몽골군의 침입에 동원되어 큰 전과를 올렸다. 한편 무인집정과의 연관성이 느슨하였기 때문에 왕정복고의 대의명분에 호응하여 국왕과 연계될 수 있는 부대였다. 최씨무신정권이 몰락한 뒤 김준·임연·임유무 정권 때에도 계속 존속하다가 1270년에 혁파되었다.
신의군 (神義軍)
신의군은 고려시대 최씨무신정권기에 조직된 삼별초의 하나이다. 몽골과의 항쟁을 주장한 최항에 의해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해온 자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신의군의 편성으로 야별초의 좌별초·우별초와 더불어 삼별초를 이루었다. 몽고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고 민족의식이 강한 군대였기 때문에 몽골군의 침입에 동원되어 큰 전과를 올렸다. 한편 무인집정과의 연관성이 느슨하였기 때문에 왕정복고의 대의명분에 호응하여 국왕과 연계될 수 있는 부대였다. 최씨무신정권이 몰락한 뒤 김준·임연·임유무 정권 때에도 계속 존속하다가 1270년에 혁파되었다.
고려후기 산정도감판관, 동판밀직사사, 지도첨의사사 등을 역임한 무신.
김흔 (金忻)
고려후기 산정도감판관, 동판밀직사사, 지도첨의사사 등을 역임한 무신.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옛 지명.
김녕 (金寧)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옛 지명.
제주항파두리항몽유적지(濟州缸波頭里抗蒙遺蹟址)는 제주특별자치도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 일대에 조성된 토성(항파두성, 항파두리성)으로, 13세기 후반 몽골 침략에 저항한 고려 삼별초의 최후 항전지이다. 1978년 유적지 정비를 실시한 후 1997년 4월 18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濟州 缸波頭里 抗蒙遺蹟址)
제주항파두리항몽유적지(濟州缸波頭里抗蒙遺蹟址)는 제주특별자치도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 일대에 조성된 토성(항파두성, 항파두리성)으로, 13세기 후반 몽골 침략에 저항한 고려 삼별초의 최후 항전지이다. 1978년 유적지 정비를 실시한 후 1997년 4월 18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
나유는 고려 후기 진도에서 원수 김방경을 따라 삼별초를 토벌하는 공을 세운 무신이다. 1269년에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원나라에 입조한 세자를 기다리고 있을 때 세자가 귀국하는 것을 만류하였다. 1271년에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하였고, 전라도와 탐라의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1274년 일본정벌에 필요한 전함을 건조할 때 공장(工匠)과 인부를 징집하였고, 1차 일본정벌에 종군하였다. 그 군공으로 원나라로부터 금패와 무덕장군관고려군천호를 받았다. 이후 원나라의 반란 세력 내안(乃顔)을 정벌하고 합단(哈丹)의 침입을 방어하는 등 변방에서 공을 세웠다.
나유 (羅裕)
나유는 고려 후기 진도에서 원수 김방경을 따라 삼별초를 토벌하는 공을 세운 무신이다. 1269년에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원나라에 입조한 세자를 기다리고 있을 때 세자가 귀국하는 것을 만류하였다. 1271년에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하였고, 전라도와 탐라의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1274년 일본정벌에 필요한 전함을 건조할 때 공장(工匠)과 인부를 징집하였고, 1차 일본정벌에 종군하였다. 그 군공으로 원나라로부터 금패와 무덕장군관고려군천호를 받았다. 이후 원나라의 반란 세력 내안(乃顔)을 정벌하고 합단(哈丹)의 침입을 방어하는 등 변방에서 공을 세웠다.
고려 무신정권의 최우집권기에 조직한 야별초(夜別抄)의 한 부대.
좌별초 (左別抄)
고려 무신정권의 최우집권기에 조직한 야별초(夜別抄)의 한 부대.
고려 후기에, 좌간의대부, 수로방호사, 동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장일 (張鎰)
고려 후기에, 좌간의대부, 수로방호사, 동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전왕온묘(傳王溫墓)는 고려 후기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고려 왕족 왕온의 묘로 전해지는 무덤이다. 왕온은 1271년 진도 용장성이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면서 피신하던 중 홍다구에 의하여 아들 왕환과 함께 살해되어,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왕무덤재에 묻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 왕온 묘 (傳 王溫 墓)
전왕온묘(傳王溫墓)는 고려 후기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고려 왕족 왕온의 묘로 전해지는 무덤이다. 왕온은 1271년 진도 용장성이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면서 피신하던 중 홍다구에 의하여 아들 왕환과 함께 살해되어,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왕무덤재에 묻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으로 축조된 백제의 성곽. 산성.
나주 자미산성 (羅州 紫薇山城)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으로 축조된 백제의 성곽. 산성.
고려 후기에, 어사, 영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김수 (金須)
고려 후기에, 어사, 영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고려후기 삼별초의 난과 관련된 무신.
노영희 (盧永禧)
고려후기 삼별초의 난과 관련된 무신.
고려 후기에, 우부승지, 지밀직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
조변 (趙抃)
고려 후기에, 우부승지, 지밀직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