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장민창(張敏昌)이고 자(字)는 이지(弛之)이다.
고려 최씨무신정권기에 한사(寒士)로서 등용되어 고종∼충렬왕대까지 주로 문한(文翰)과 대간(臺諫) 직을 두루 맡아보았으며, 몽골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을 작성하고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대몽외교에도 간여하였다.
창녕군리(昌寧郡吏)로 고종 때 급제한 뒤 집에서 15년을 지내다가 승평판관(昇平判官)에 임명되었다. 판관 재직시에 업적을 많이 남겨 세상에 알려졌지만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옛집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안찰사 왕해(王諧)가 추천하여 직사관(直史館, 8품)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정6품)가 되었다.
1252년(고종 39)에 이현(李峴)이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대몽외교에도 공헌하였다. 원종 초에 시랑 김지석(金之錫)과 교대로 전라도·충청도·경상도 3도를 안찰하여 결단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이후 병부시랑(兵部侍郞)·예부시랑(禮部侍郞)·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정4품)를 역임하였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가 진도를 거점으로 항쟁을 일으키자, 장일이 일찍이 남쪽 지방에서 민심을 얻었다고 하여 경상수로방호사(慶尙水路防護使)에 임명되었다. 남해도(南海島)에 웅거한 삼별초의 유존혁(劉存奕) 부대를 견제하였으며 삼별초 항쟁을 진압하는데 일조하였다.
전후 8회에 걸쳐 몽골에 사신으로 갔으나 나라를 욕되게 한 적이 없었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왕이 공주와 함께 귀국할 때 몽골 복장을 하고 개경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이를 만류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같은 해에 일본원정군이 합포(合浦: 지금의 마산)로 돌아오게 되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서 이들을 맞아 위로하였다. 1276년(충렬왕 2)에 지첨의부사 보문서태학사 수국사(知僉議府事寶文署太學士修國史)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장일의 열전(列傳)이 『고려사』권106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