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언론"
검색결과 총 24건
조선시대의 간쟁(諫諍)·논박(論駁)을 관장하던 관서.
사간원 (司諫院)
조선시대의 간쟁(諫諍)·논박(論駁)을 관장하던 관서.
1907년 7월 24일 집회와 결사·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게 제정, 반포하게 한 법률.
보안법 (保安法)
1907년 7월 24일 집회와 결사·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게 제정, 반포하게 한 법률.
간쟁은 고려·조선시대 국왕의 잘못된 명령과 행위에 대해 언관(言官)이 비판하는 행위이다. 원래 간쟁은 간관(諫官)이 수행하는 기능이지만, 대관(臺官)도 담당하였고 홍문관(弘文館)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간쟁은 직접 말로 하거나 문서를 작성하여 올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간쟁은 왕권의 잘못된 행사를 견제하는 성격이 있었다.
간쟁 (諫諍)
간쟁은 고려·조선시대 국왕의 잘못된 명령과 행위에 대해 언관(言官)이 비판하는 행위이다. 원래 간쟁은 간관(諫官)이 수행하는 기능이지만, 대관(臺官)도 담당하였고 홍문관(弘文館)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간쟁은 직접 말로 하거나 문서를 작성하여 올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간쟁은 왕권의 잘못된 행사를 견제하는 성격이 있었다.
1980년 신군부 주도 하에 신문·방송·통신을 통폐합한 사건.
언론 통폐합 사건 (言論 統廢合 事件)
1980년 신군부 주도 하에 신문·방송·통신을 통폐합한 사건.
대사헌은 조선시대, 언론기관 가운데 하나인 사헌부의 수장으로 종2품직이다. 사헌부는 신료들에 대한 감찰 및 탄핵, 국왕에 대한 간쟁, 경연 참석, 5품 이하의 서경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대사헌은 사헌부의 활동 전반을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용재총화』에서는 대사헌 이하 사헌부 관료들의 위계질서가 매우 엄격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성종 대 이후로 당하관 이하 청요직들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대사헌의 위상이 다소 축소되었다.
대사헌 (大司憲)
대사헌은 조선시대, 언론기관 가운데 하나인 사헌부의 수장으로 종2품직이다. 사헌부는 신료들에 대한 감찰 및 탄핵, 국왕에 대한 간쟁, 경연 참석, 5품 이하의 서경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대사헌은 사헌부의 활동 전반을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용재총화』에서는 대사헌 이하 사헌부 관료들의 위계질서가 매우 엄격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성종 대 이후로 당하관 이하 청요직들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대사헌의 위상이 다소 축소되었다.
조선 후기에, 『남당집』, 『주자언론동이고』 등을 저술하였으며, 호락논쟁에서 호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
한원진 (韓元震)
조선 후기에, 『남당집』, 『주자언론동이고』 등을 저술하였으며, 호락논쟁에서 호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대회에서 채택한 선언.
자유언론실천선언 (自由言論實踐宣言)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대회에서 채택한 선언.
제5공화국시기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 언론사 기사통제를 위해 작성한 가이드라인.
보도지침 (報道指針)
제5공화국시기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 언론사 기사통제를 위해 작성한 가이드라인.
이종린은 일제강점기 독립신문 주필, 천도교월보 사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종교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83년 충남 서산 출생으로 1907년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이후 제국신문, 대한민보, 천도교월보 등에서 기자, 논설위원, 주필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독립신문 주필 활동으로 3년 만기 복역 후 출소해 일제의 경제 수탈정책과 언론탄압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전시동원체제에 협력하였다. 이종린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이종린 (李鍾麟)
이종린은 일제강점기 독립신문 주필, 천도교월보 사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종교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83년 충남 서산 출생으로 1907년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이후 제국신문, 대한민보, 천도교월보 등에서 기자, 논설위원, 주필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독립신문 주필 활동으로 3년 만기 복역 후 출소해 일제의 경제 수탈정책과 언론탄압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전시동원체제에 협력하였다. 이종린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중앙통신 보도국장, 주필 등을 역임한 언론인.
한재덕 (韓載德)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중앙통신 보도국장, 주필 등을 역임한 언론인.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신문사.
한겨레신문사 (한겨레新聞社)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신문사.
전국민을 대상으로 주식을 공모하여 1988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한겨레
전국민을 대상으로 주식을 공모하여 1988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협상선거법은 1958년 1월에 선거공영제와 참관인 권한 확대를 골자로, 여야 합의에 의해 개정된 선거법 개정안이다. 1958년 5월에 4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 등은 선거법을 개정하기 위한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자유당이 주장한 선거공영제와 야당 측이 주장한 참관인 권한 확대를 모두 수용하는 방식으로 협상이 타결되었다. 언론 조항 때문에 논란이 일었지만 여야가 합의한 선거법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협상선거법으로 치러진 1958년 4대 총선 결과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체제가 확립되었다.
협상선거법 (協商選擧法)
협상선거법은 1958년 1월에 선거공영제와 참관인 권한 확대를 골자로, 여야 합의에 의해 개정된 선거법 개정안이다. 1958년 5월에 4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 등은 선거법을 개정하기 위한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자유당이 주장한 선거공영제와 야당 측이 주장한 참관인 권한 확대를 모두 수용하는 방식으로 협상이 타결되었다. 언론 조항 때문에 논란이 일었지만 여야가 합의한 선거법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협상선거법으로 치러진 1958년 4대 총선 결과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체제가 확립되었다.
KBS사태는 1990년 3~5월, 언론민주화 과정에서 발생한 KBS 노동조합의 파업 농성 사건이다. 노태우 정부는 KBS의 민주화에 불만을 품고 당시 KBS 노동조합에 유화적이던 한국방송공사 사장 서영훈을 경영상 문제를 이유로 1990년 3월 초 해임하고 4월 초 후임 사장으로 서기원을 선임하였다. 이에 KBS 노동조합은 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서기원의 출근을 저지하는 한편 파업 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방송사에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다수의 노동조합원들이 연행되었고, 결국 5월 중순 노동조합이 제작에 복귀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KBS사태 (KBS事態)
KBS사태는 1990년 3~5월, 언론민주화 과정에서 발생한 KBS 노동조합의 파업 농성 사건이다. 노태우 정부는 KBS의 민주화에 불만을 품고 당시 KBS 노동조합에 유화적이던 한국방송공사 사장 서영훈을 경영상 문제를 이유로 1990년 3월 초 해임하고 4월 초 후임 사장으로 서기원을 선임하였다. 이에 KBS 노동조합은 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서기원의 출근을 저지하는 한편 파업 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방송사에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다수의 노동조합원들이 연행되었고, 결국 5월 중순 노동조합이 제작에 복귀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언론계에 필요한 각종 사업을 개발, 전개하기 위하여 설립된 재단법인.
한국언론진흥재단 (韓國言論振興財團)
언론계에 필요한 각종 사업을 개발, 전개하기 위하여 설립된 재단법인.
우헌납은 조선시대에 국왕에게 간쟁하는 일을 맡은 간관 계열의 직제이다. 고려시대 간쟁을 담당하던 중서문하성의 낭사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여러 차례의 직제 변경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1401년(태종 1)에 문하부가 혁파되고 사간원이 독립기구로 개편될 때 좌 · 우헌납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1460년(세조 6) 좌헌납과 함께 혁파되었다가 1463년(세조 9)에 헌납 1인이 재설치되면서 우헌납의 직명이 사라지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사간원에 정5품의 헌납1좌로 정리되었다.
우헌납 (右獻納)
우헌납은 조선시대에 국왕에게 간쟁하는 일을 맡은 간관 계열의 직제이다. 고려시대 간쟁을 담당하던 중서문하성의 낭사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여러 차례의 직제 변경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1401년(태종 1)에 문하부가 혁파되고 사간원이 독립기구로 개편될 때 좌 · 우헌납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1460년(세조 6) 좌헌납과 함께 혁파되었다가 1463년(세조 9)에 헌납 1인이 재설치되면서 우헌납의 직명이 사라지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사간원에 정5품의 헌납1좌로 정리되었다.
2000년 11월 24일 한국의 신문, 방송, 출판, 인쇄 등의 매체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구성한 단일 산업별노조.
전국언론노동조합 (全國言論勞動組合)
2000년 11월 24일 한국의 신문, 방송, 출판, 인쇄 등의 매체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구성한 단일 산업별노조.
1928년 임실에서 발생한 일본 경찰의 신문기자 검거 사건.
전북기자대회사건 (全北記者大會事件)
1928년 임실에서 발생한 일본 경찰의 신문기자 검거 사건.
기독신보는 1915년, 감리교, 장로교 교파 연합신문으로 창간된 한글 주간 신문이다. 일제강점기 초기 일제가 한국인에게는 신문 발행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 크램(W. G. Cram)의 명의로 『기독신보』를 창간하였고, 한국인도 주필, 편집 위원 등의 이름으로 경영 및 제작에 참여하였다. 7명의 선교사 사장을 거친 후 1933년 6월 28일 최초의 한국인 사장으로 전필순 목사가 선임되었으나, 이후 경영권을 둘러싼 갈등 끝에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채 1937년 8월 휴간 후 1938년 1월 폐간되었다.
기독신보 (긔독신보 THE CHRISTIAN MESSENGER 基督申報)
기독신보는 1915년, 감리교, 장로교 교파 연합신문으로 창간된 한글 주간 신문이다. 일제강점기 초기 일제가 한국인에게는 신문 발행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 크램(W. G. Cram)의 명의로 『기독신보』를 창간하였고, 한국인도 주필, 편집 위원 등의 이름으로 경영 및 제작에 참여하였다. 7명의 선교사 사장을 거친 후 1933년 6월 28일 최초의 한국인 사장으로 전필순 목사가 선임되었으나, 이후 경영권을 둘러싼 갈등 끝에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채 1937년 8월 휴간 후 1938년 1월 폐간되었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1975년 박정희 군사정권과 동아일보사의 경영진에 의해 쫓겨난 동아일보 기자들이 결성한 조직이다. 해당 언론사 경영진에 맞서 해직기자들의 복직과 언론의 민주화, 자유언론을 실천하기 위한 효율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결성하였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東亞自由言論守護鬪爭委員會)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1975년 박정희 군사정권과 동아일보사의 경영진에 의해 쫓겨난 동아일보 기자들이 결성한 조직이다. 해당 언론사 경영진에 맞서 해직기자들의 복직과 언론의 민주화, 자유언론을 실천하기 위한 효율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