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정변"
검색결과 총 116건
무신정권은 1170년부터 1270년 사이에 무신 세력에 의해 주도된 고려 왕조의 정권이다. 무신 세력은 삼별초 등 사병집단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정방·교정별감 등의 기구를 설치하여 전횡을 일삼고 독재정치를 행하였다. 무신정권기에 불법적 토지 강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농민과 천민 등 하부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민란 발생과 더불어 신분질서의 동요가 일어났다. 무신정권 집권 후반부 40년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팔만대장경 제조 등으로 강렬한 민족주체의식이 발휘되었고 이는 후대의 배원정책으로 이어졌다.
무신정권 (武臣政權)
무신정권은 1170년부터 1270년 사이에 무신 세력에 의해 주도된 고려 왕조의 정권이다. 무신 세력은 삼별초 등 사병집단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정방·교정별감 등의 기구를 설치하여 전횡을 일삼고 독재정치를 행하였다. 무신정권기에 불법적 토지 강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농민과 천민 등 하부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민란 발생과 더불어 신분질서의 동요가 일어났다. 무신정권 집권 후반부 40년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팔만대장경 제조 등으로 강렬한 민족주체의식이 발휘되었고 이는 후대의 배원정책으로 이어졌다.
갑신혁신정강(甲申革新政綱)은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등 개화당이 독립과 개혁을 목표로 공포한 14개조 개혁안이다. 대내적으로는 정치권력의 장악, 정치체제의 정비, 경제적 · 군사적 기반 조성에 중점을 두었다.
갑신혁신정강 (甲申革新政綱)
갑신혁신정강(甲申革新政綱)은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등 개화당이 독립과 개혁을 목표로 공포한 14개조 개혁안이다. 대내적으로는 정치권력의 장악, 정치체제의 정비, 경제적 · 군사적 기반 조성에 중점을 두었다.
위화도회군은 1388년(우왕 14)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李成桂)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우왕 재위 기간 내내 고려와 명나라는 갈등을 겪었는데, 1388년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는 요동 정벌을 결정하고 5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였다. 군대를 이끌었던 이성계는 정벌 자체에 반대하였고, 출진 이후에도 정벌을 중단하자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단독으로 회군해 개경을 공격하여 우왕과 최영을 축출하였다.
위화도회군 (威化島回軍)
위화도회군은 1388년(우왕 14)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李成桂)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우왕 재위 기간 내내 고려와 명나라는 갈등을 겪었는데, 1388년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는 요동 정벌을 결정하고 5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였다. 군대를 이끌었던 이성계는 정벌 자체에 반대하였고, 출진 이후에도 정벌을 중단하자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단독으로 회군해 개경을 공격하여 우왕과 최영을 축출하였다.
김옥균은 우리나라 개화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자 갑신정변의 주모자이다. 1870년대 개화사상을 수용하였고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4년 12월 우정국 준공 축하연 날에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청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양반 지배체제 청산 등의 정령을 반포하는 개혁을 진행하였지만, 4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894년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으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갑오개혁 시기에 사면 복권되었고, 1910년에 충달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옥균 (金玉均)
김옥균은 우리나라 개화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자 갑신정변의 주모자이다. 1870년대 개화사상을 수용하였고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4년 12월 우정국 준공 축하연 날에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청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양반 지배체제 청산 등의 정령을 반포하는 개혁을 진행하였지만, 4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894년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으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갑오개혁 시기에 사면 복권되었고, 1910년에 충달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윤보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7년에 태어나 1990년에 사망했다. 20세 때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신익희 등의 권유로 영국에 유학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다. 미군정청·이승만정부에도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했다. 4·19 이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하야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5만 7천표 차이로 패배하고 이후 야권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에 공헌했다.
윤보선 (尹潽善)
윤보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7년에 태어나 1990년에 사망했다. 20세 때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신익희 등의 권유로 영국에 유학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다. 미군정청·이승만정부에도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했다. 4·19 이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하야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5만 7천표 차이로 패배하고 이후 야권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에 공헌했다.
김홍일은 일제강점기 1·8 일왕저격, 4·29 상해의거 당시의 독립운동가이다.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했다. 신천경신학교 교사 재직 중 항일단체 가담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0년 중국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1932년 이봉창의 1·8 일왕저격 및 윤봉길의 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국회의원, 정당 당수 등 정치가로 활동했다.
김홍일 (金弘壹)
김홍일은 일제강점기 1·8 일왕저격, 4·29 상해의거 당시의 독립운동가이다.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했다. 신천경신학교 교사 재직 중 항일단체 가담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0년 중국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1932년 이봉창의 1·8 일왕저격 및 윤봉길의 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국회의원, 정당 당수 등 정치가로 활동했다.
고려 후기 몽고가 고려의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부.
쌍성총관부 (雙城摠管府)
고려 후기 몽고가 고려의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부.
강조의 정변은 고려 전기 목종 때 강조가 일으킨 정변이다. 강조가 1009년(목종 12) 목종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즉 현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讓國公)'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지키게 하는 한편, 김치양(金致陽)과 그의 아들 및 참소를 일삼던 유행간 등 7인을 잡아 베고 그 여당(餘黨)과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친속(親屬) 30여 인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강조의 정변 (康兆의 政變)
강조의 정변은 고려 전기 목종 때 강조가 일으킨 정변이다. 강조가 1009년(목종 12) 목종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즉 현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讓國公)'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지키게 하는 한편, 김치양(金致陽)과 그의 아들 및 참소를 일삼던 유행간 등 7인을 잡아 베고 그 여당(餘黨)과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친속(親屬) 30여 인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고려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948년(정종 3)에 태어나 1031년(현종 22)에 사망했다. 1010년(현종 1) 요(遼)나라가 서경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했고, 1018년(현종 9) 요나라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상원수대장군으로서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귀주대첩이라 불리는 이 큰 승리 이후 요나라와 평화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된다. 고려의 국방을 튼튼히 하고 외교 관계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강감찬 (姜邯贊)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고려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948년(정종 3)에 태어나 1031년(현종 22)에 사망했다. 1010년(현종 1) 요(遼)나라가 서경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했고, 1018년(현종 9) 요나라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상원수대장군으로서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귀주대첩이라 불리는 이 큰 승리 이후 요나라와 평화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된다. 고려의 국방을 튼튼히 하고 외교 관계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대한제국기 「묵란」, 「노근묵란」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정치인.
민영익 (閔泳翊)
대한제국기 「묵란」, 「노근묵란」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정치인.
한성조약은 1884년(고종 21)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1884년 11월 24일에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권력을 잡은 민씨정권은 정변에 개입한 일본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가 압도하고 있는 상황을 역전시키고자 조선 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병력과 군함을 파견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무력을 앞세운 교섭으로 5개 조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와 대등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한성조약 (漢城條約)
한성조약은 1884년(고종 21)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1884년 11월 24일에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권력을 잡은 민씨정권은 정변에 개입한 일본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가 압도하고 있는 상황을 역전시키고자 조선 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병력과 군함을 파견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무력을 앞세운 교섭으로 5개 조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와 대등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의민은 고려후기 상장군,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96년(명종 26)에 사망했다. 용력이 뛰어나 경군에 선발되었고 의종의 총애로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에 행동파 무신으로 가담했고, 1173년 김보당의 의종복위운동 때에는 의종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117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상장군에 올랐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경대승이 1183년에 사망하자 무신집정의 자리에 올라 12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1196년 최충헌 형제에게 피살되었다.
이의민 (李義旼)
이의민은 고려후기 상장군,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96년(명종 26)에 사망했다. 용력이 뛰어나 경군에 선발되었고 의종의 총애로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에 행동파 무신으로 가담했고, 1173년 김보당의 의종복위운동 때에는 의종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117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상장군에 올랐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경대승이 1183년에 사망하자 무신집정의 자리에 올라 12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1196년 최충헌 형제에게 피살되었다.
보현원사건은 1170년(의종 24) 무신 정중부(鄭仲夫) 등이 보현원(普賢院)에서 문신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보현원은 개경 동남쪽에 있던 사찰이고, 의종이 자주 행차하여 연회를 즐긴 장소였다. 의종은 정사를 멀리하고 문신들과 더불어 연회를 즐겼던 반면, 이를 호위하던 무신들은 상대적으로 차별받았다. 승선 임종식과 기거주 한뢰 등은 의종의 총애를 믿고 무신을 멸시하여 그들의 분노가 점점 쌓였다. 같은 해 8월 의종과 문신들이 보현원으로 행차하자, 정중부 등이 정변을 일으켜 왕의 측근 문신들과 환관을 대부분 살육하였다.
보현원사건 (普賢院事件)
보현원사건은 1170년(의종 24) 무신 정중부(鄭仲夫) 등이 보현원(普賢院)에서 문신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보현원은 개경 동남쪽에 있던 사찰이고, 의종이 자주 행차하여 연회를 즐긴 장소였다. 의종은 정사를 멀리하고 문신들과 더불어 연회를 즐겼던 반면, 이를 호위하던 무신들은 상대적으로 차별받았다. 승선 임종식과 기거주 한뢰 등은 의종의 총애를 믿고 무신을 멸시하여 그들의 분노가 점점 쌓였다. 같은 해 8월 의종과 문신들이 보현원으로 행차하자, 정중부 등이 정변을 일으켜 왕의 측근 문신들과 환관을 대부분 살육하였다.
1894년 3월 28일 김옥균이 상해(上海)에서 홍종우(洪鍾宇)에 의해 저격, 피살된 사건.
김옥균 암살사건 (金玉均 暗殺事件)
1894년 3월 28일 김옥균이 상해(上海)에서 홍종우(洪鍾宇)에 의해 저격, 피살된 사건.
1884년 3월 27일(양력 4월 22일) 우체 업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된 관청.
우정총국 (郵征總局)
1884년 3월 27일(양력 4월 22일) 우체 업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된 관청.
조위총의 난은 1174년(명종 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武臣政權)에 반발해 일으킨 저항이다. 이 저항은 1173년(명종 3) 동계(東界) 김보당(金甫當)의 저항 이후 무신정권에 대한 위기 의식과 지방 사회의 폐단이 증폭되면서 촉발되었다. 저항 세력은 국도 개경(開京) 근처까지 위협할 정도로 거세게 저항했지만, 1176년(명종 6) 조위총이 제거됨으로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일반 민이 중심이 되어 저항을 이어갔다.
조위총의 난 (趙位寵의 亂)
조위총의 난은 1174년(명종 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武臣政權)에 반발해 일으킨 저항이다. 이 저항은 1173년(명종 3) 동계(東界) 김보당(金甫當)의 저항 이후 무신정권에 대한 위기 의식과 지방 사회의 폐단이 증폭되면서 촉발되었다. 저항 세력은 국도 개경(開京) 근처까지 위협할 정도로 거세게 저항했지만, 1176년(명종 6) 조위총이 제거됨으로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일반 민이 중심이 되어 저항을 이어갔다.
원종은 고려 후기 제24대(1259~1274) 왕이다. 친몽 정책(親蒙政策)을 추진하여 김준, 임연 등 무신 집정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임연을 사주해 김준을 제거하였지만 임연과의 갈등으로 폐위되었다가 몽골의 개입으로 복위되기도 하였다.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1270년(원종 11) 전격적으로 개경 환도(開京還都)와 삼별초 해산을 명하였고, 이로 인하여 삼별초의 난이 촉발되었다. 몽골에 대한 복속과 타협으로 원 간섭기(元干涉期)의 출발을 가져왔지만,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고 고려 국체의 유지, 보존이라는 현실적 선택을 했던 왕이다.
원종 (元宗)
원종은 고려 후기 제24대(1259~1274) 왕이다. 친몽 정책(親蒙政策)을 추진하여 김준, 임연 등 무신 집정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임연을 사주해 김준을 제거하였지만 임연과의 갈등으로 폐위되었다가 몽골의 개입으로 복위되기도 하였다.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1270년(원종 11) 전격적으로 개경 환도(開京還都)와 삼별초 해산을 명하였고, 이로 인하여 삼별초의 난이 촉발되었다. 몽골에 대한 복속과 타협으로 원 간섭기(元干涉期)의 출발을 가져왔지만,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고 고려 국체의 유지, 보존이라는 현실적 선택을 했던 왕이다.
김준은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戊午政變)을 주동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이어 시중(侍中)까지 오른 무신이다. 무오정변은 김준이 유경·박송비 등과 함께 최씨 무신정권의 4대 집정자 최의를 제거하여 왕정복고를 이룬 정변을 가리킨다. 이후 김준은 자기 휘하의 위사공신들과 연대하여 유경 등을 실각시키면서 ‘김준 정권’을 탄생시키고, 1265년(원종 3) 시중에 오르면서 해양후(海陽侯)에도 책봉되었다. 그는 정권을 독차지하면서 국왕 원종 및 몽골과 갈등하다가 1268년(원종 9) 임연에게 참살되었다.
김준 (金俊)
김준은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戊午政變)을 주동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이어 시중(侍中)까지 오른 무신이다. 무오정변은 김준이 유경·박송비 등과 함께 최씨 무신정권의 4대 집정자 최의를 제거하여 왕정복고를 이룬 정변을 가리킨다. 이후 김준은 자기 휘하의 위사공신들과 연대하여 유경 등을 실각시키면서 ‘김준 정권’을 탄생시키고, 1265년(원종 3) 시중에 오르면서 해양후(海陽侯)에도 책봉되었다. 그는 정권을 독차지하면서 국왕 원종 및 몽골과 갈등하다가 1268년(원종 9) 임연에게 참살되었다.
개화당은 근대 개화기 독립과 개화를 기치로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하여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정치 집단이다. 1870년대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형성한 초기 개화사상, 중국을 통해 수용한 서구 문물 등을 공부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이 현실 정치에서 개화사상을 실현하고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형성한 정치 세력이다. 개화당은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개화당 (開化黨)
개화당은 근대 개화기 독립과 개화를 기치로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하여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정치 집단이다. 1870년대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형성한 초기 개화사상, 중국을 통해 수용한 서구 문물 등을 공부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이 현실 정치에서 개화사상을 실현하고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형성한 정치 세력이다. 개화당은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중앙정보부는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설치한 국가정보·수사기관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의 주체들이 주도하여 군사정부 최고 의결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설치하였다. 군사정부의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제거하고,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며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범죄를 수사하고, 군을 포함한 국가 각 기관의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감독하는 특수 기관이었다. 1979년 10·26 사건을 계기로 신군부가 주도하여 입법한 국가안전기획부법에 따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되었다.
중앙정보부 (中央情報部)
중앙정보부는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설치한 국가정보·수사기관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의 주체들이 주도하여 군사정부 최고 의결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설치하였다. 군사정부의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제거하고,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며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범죄를 수사하고, 군을 포함한 국가 각 기관의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감독하는 특수 기관이었다. 1979년 10·26 사건을 계기로 신군부가 주도하여 입법한 국가안전기획부법에 따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