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조선의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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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통신』은 1939년 조선의용대 대본부에서 조선의용대의 공작과 활동을 다룬 회보이며 기관지이다. 조선의용대통신은 계림에 도착하여 한중간의 연합 항일 공작을 올바르게 전개하고자 발간하였다. 판매본이었으며, 1기∼27기는 열흘마다 발간되었고, 28기부터는 반월간, 월간 혹은 부정기 간행물이 되었다. 43기부터는 『조선의용대』로 바뀌었다. 주요 내용은 조선의용대의 활동, 정세분석, 국제정세, 중국 항전 상황, 일본 침략 관련 소식 등이었다. 이 잡지는 조선의용대의 전략과 활동을 알리고, 대외적으로 그들의 항일운동을 홍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선의용대통신 (朝鮮義勇隊通訊)
『조선의용대통신』은 1939년 조선의용대 대본부에서 조선의용대의 공작과 활동을 다룬 회보이며 기관지이다. 조선의용대통신은 계림에 도착하여 한중간의 연합 항일 공작을 올바르게 전개하고자 발간하였다. 판매본이었으며, 1기∼27기는 열흘마다 발간되었고, 28기부터는 반월간, 월간 혹은 부정기 간행물이 되었다. 43기부터는 『조선의용대』로 바뀌었다. 주요 내용은 조선의용대의 활동, 정세분석, 국제정세, 중국 항전 상황, 일본 침략 관련 소식 등이었다. 이 잡지는 조선의용대의 전략과 활동을 알리고, 대외적으로 그들의 항일운동을 홍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 사망했다. 1919년에 의열단을 조직하여 요인 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으며, 한국민족혁명당 조직,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조선의용대 편성 등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군사부분 주요직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에 주력했다. 여운형 암살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등을 역임하다 1958년 숙청당했다.
김원봉 (金元鳳)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 사망했다. 1919년에 의열단을 조직하여 요인 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으며, 한국민족혁명당 조직,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조선의용대 편성 등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군사부분 주요직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에 주력했다. 여운형 암살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등을 역임하다 1958년 숙청당했다.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의 아들로,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국군창설에 참여하며 육군 소장 등을 역임한 군인·독립운동가.
박시창 (朴始昌)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의 아들로,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국군창설에 참여하며 육군 소장 등을 역임한 군인·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근우회, 의열단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박차정 (朴次貞)
일제강점기 때,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근우회, 의열단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김성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승려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호는 운암(雲巖), 성숙(星淑)은 법명이다. 1916년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주요 독립운동 활동으로 3·1 운동 주도, 조선의열단 가담, 조선의용대 조직 및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 등이 있다. 광복 후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지지하였으며, 진보당사건(1955년)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9년 서거하였으며,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성숙 (金星淑)
김성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승려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호는 운암(雲巖), 성숙(星淑)은 법명이다. 1916년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주요 독립운동 활동으로 3·1 운동 주도, 조선의열단 가담, 조선의용대 조직 및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 등이 있다. 광복 후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지지하였으며, 진보당사건(1955년)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9년 서거하였으며,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윤징우는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와 광복군 제1지대 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8·15광복 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을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조선민족혁명당과 8·15광복 후 개편된 인민공화당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였고, 북한 정권 수립에도 참여하였다.
윤징우 (尹澄宇)
윤징우는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와 광복군 제1지대 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8·15광복 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을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조선민족혁명당과 8·15광복 후 개편된 인민공화당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였고, 북한 정권 수립에도 참여하였다.
송복덕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경위대 대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충칭 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내무부 경위대 대원에 임명되어 요인 경호 및 경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관병소비합작사의 사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독립당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송복덕 (宋福德)
송복덕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경위대 대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충칭 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내무부 경위대 대원에 임명되어 요인 경호 및 경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관병소비합작사의 사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독립당원으로도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의 좌익정당.
조선민족혁명당 (朝鮮民族革命黨)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의 좌익정당.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용대 총무조장, 광복군 제1지대 지대장, 임시정부 정원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종희 (李鍾熙)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용대 총무조장, 광복군 제1지대 지대장, 임시정부 정원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남조선대표 대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성주식 (成周寔)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남조선대표 대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중국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한재갑 (韓載甲)
일제강점기 때, 중국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육주임, 조선의용대 부대장, 한국광복군 중교 등을 역임한 군인·독립운동가.
신악 (申岳)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육주임, 조선의용대 부대장, 한국광복군 중교 등을 역임한 군인·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용대, 조선민족혁명당,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 인민공화당 간부, 민주조선사 편집부국장 등을 역임한 관료·언론인·독립운동가.
왕통 (王通)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용대, 조선민족혁명당,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 인민공화당 간부, 민주조선사 편집부국장 등을 역임한 관료·언론인·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중국 만현에서 병원을 운영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후보위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비서장 등을 역임한 의사·독립운동가.
최성오 (崔省吾)
일제강점기 때, 중국 만현에서 병원을 운영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후보위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비서장 등을 역임한 의사·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군사학 편찬위원, 조선의용대 제3지대장 등을 역임한 군인·독립운동가.
김세광 (金世光)
일제강점기 때,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군사학 편찬위원, 조선의용대 제3지대장 등을 역임한 군인·독립운동가.
동방각민족반파시스트대동맹은 1941년 10월 중국 옌안[延安]에서 결성된 동아시아 민족운동 세력의 반제국 · 반일 국제연대기구이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아시아 피압박 민족운동 세력을 망라하는 국제대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주비회의에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태국·버어마·베트남·필리핀·인도·유태·타이완·조선·일본 등의 반제국·반침략운동 세력과 중국의 한족·만주족·몽골족·회족·장족·묘족·이족 등 18개 민족 대표가 참여하였다. 이어서 개최된 대표회의에서 스탈린·루즈벨트·처칠·네루·타고르·장제스·마오쩌뚱·김구 등 35명의 명예 주석단이 선출되었다.
동방각민족반파시스트대동맹 (東方各民族反fascist大同盟)
동방각민족반파시스트대동맹은 1941년 10월 중국 옌안[延安]에서 결성된 동아시아 민족운동 세력의 반제국 · 반일 국제연대기구이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아시아 피압박 민족운동 세력을 망라하는 국제대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주비회의에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태국·버어마·베트남·필리핀·인도·유태·타이완·조선·일본 등의 반제국·반침략운동 세력과 중국의 한족·만주족·몽골족·회족·장족·묘족·이족 등 18개 민족 대표가 참여하였다. 이어서 개최된 대표회의에서 스탈린·루즈벨트·처칠·네루·타고르·장제스·마오쩌뚱·김구 등 35명의 명예 주석단이 선출되었다.
김유신은 일제강점기 1930년대 중반 중국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를 졸업하고, 화베이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들이 중심이 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참여하였다. 한국광복군의 통합에 따라 광복군에 입대하여 제2지대에 배속되었다. 1942년 조선의용군 개편에 합류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태항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김유신 (金有信)
김유신은 일제강점기 1930년대 중반 중국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를 졸업하고, 화베이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들이 중심이 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참여하였다. 한국광복군의 통합에 따라 광복군에 입대하여 제2지대에 배속되었다. 1942년 조선의용군 개편에 합류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태항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한금원은 일제강점기 도쿄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 현장에 있었으며, 군의로 활동하였다. 1942년 한국광복군에서도 의사로서 활동하였다.
한금원 (韓錦源)
한금원은 일제강점기 도쿄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 현장에 있었으며, 군의로 활동하였다. 1942년 한국광복군에서도 의사로서 활동하였다.
이정호는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에서 무장투쟁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방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둥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광복군에 입대하여 무장투쟁 활동에 참여하였다. 1940년대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 외무부 총무과장, 선전위원 등에 선임되어 민족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정호 (李貞浩)
이정호는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에서 무장투쟁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방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둥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광복군에 입대하여 무장투쟁 활동에 참여하였다. 1940년대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 외무부 총무과장, 선전위원 등에 선임되어 민족운동에 투신하였다.
최봉윤은 일제강점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 평양에서 평양기독학생종교부회총합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일맥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8년 미국 이주 후에는 국어 교육에 앞장섰으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최초 한인 교수가 되었다. 1941년부터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관료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남북통일 방략으로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제안하였다.
최봉윤 (崔鳳潤)
최봉윤은 일제강점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 평양에서 평양기독학생종교부회총합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일맥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8년 미국 이주 후에는 국어 교육에 앞장섰으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최초 한인 교수가 되었다. 1941년부터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관료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남북통일 방략으로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제안하였다.